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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해요,인천섬여행]8.소야도

패총·토기 … 신석기인의 흔적 가득 4천년 전의 소야도 ‘살기 좋았구나’

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2017년 04월 14일 금요일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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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회원
‘소야도(蘇爺島)’는 덕적군도의 한 섬으로 행정구역상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 소야리에 속한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고속페리호로 50분 정도 소요된다.

 덕적도와 큰 갯골(도깡)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소야도는 인구 약 250명이 거주하고 있다. 면적 3.03㎢, 해안선 길이 14.4㎞의 작은 섬이다. 소야도에서 덕적도 쪽인 서북쪽 해안의 ‘나룻개 포구’는 덕적도의 도우포구와 마주하고 있으며 정기여객선이 기항하는 곳이다. 덕적도 도우포구 간의 도선이 수시로 왕복하고 있다. 특히 소야도에서 덕적중·고등학교로 통학하는 학생들도 이 도선을 이용한다.

소야도의 전체적인 지형은 구릉의 기복이 심하고, 남동부와 남서부 해안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넓은 간석지로 둘러싸여 있다. 북동부 해안의 간석지 끝에는 암초열(岩礁列)이 형성돼 자연적인 방조제 구실을 하고 있다. 섬 주위에 천연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바다 낚시터와 피서지로도 유명하다. 또 뗏부루 해수욕장, 장군바위, 솔섬·송곳여·물푸레섬 등으로 이어지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사주(모래톱)가 발달한 곳으로 유명하다. 밀물 때는 독립된 섬이다. 하지만 썰물 때는 모래와 자갈 등으로 이뤄진 사주가 내륙과 연결돼 도보로 오갈 수 있는 신비스러운 지형이다.

▲ 소야도 나루개(선착장 남쪽) 유적지 패총 단면
소야도는 섬의 기반암으로 보이는 규암·편암과 이를 불규칙적으로 관입한 반상화강암이 주를 이루고 있다. 텃골 동쪽의 해안가와 큰말 동쪽의 가도 부근에는 규암·편암과 반상화강암의 노두가 잘 발달돼 있다.

소야도는 예로부터 사람이 거주하기에 매우 좋았던 지역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개더미(貝塚)’이다. 본도인 덕적도보다 유적의 숫자가 규모에 비해 월등히 많으며, 소야도 전역에 패총 유적이 산재해 있다. 조개더미는 주로 굴 껍데기로 이뤄져 있다. 당시 소야도 해안가에서 자라던 굴을 주된 식량원으로 삼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만큼 소야도 해안지역이 주변의 다른 섬 지역에 비해 굴과 어패류가 생장하기에 좋았던 환경임을 방증한다.

대표적인 곳으로 ‘나룻개유적’, ‘선촌유적’, ‘터골유적’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나룻개 패총’은 도우선착장에서 약 2분 거리에 있다. 산의 능선 말단부에 해당하는 야트막한 사구에 형성돼 있다. 지금은 송전탑과 소나무들이 있으며, 덕적도와 연결하는 연도교 공사를 위해 포클레인 터파기 공사 중 발견됐다. 2015년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출토 유물은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화살촉 등 석기가 다수 출토됐으며 저장시설, 화덕 자리가 확인됐다. 특이한 점은 모래층 위에 20여 기의 화덕을 집중적으로 설치해 조리했다는 점이다. 화덕 자리는 돌을 원형 혹은 타원형으로 깔아 사용했다. 이는 서해안 해안가에서 찾을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 뗏부루 해수욕장
‘선촌부락’은 소야도에서 가장 가구 수가 많은 곳이다. 민가 사이에 위치한 경작지에 굴 껍데기가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신석기시대의 패총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마을(유적) 뒤로는 산이 위치하고, 앞으로는 바로 바다가 인접해 있어 사람이 살기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유적은 경작지(밭)로 사용되고 있는데, 곳곳에서 빗살무늬토기 파편 등이 발견되고 있다.

소야도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다가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번갈아 점령함에 따라 소속이 바뀌었다. 소정방(蘇定方)이 백제 정벌 때 13만 대군을 이끌고 소야도에 머물렀다. 신라가 나당 연합군을 편성해 백제 정벌과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신라의 역사적 대업을 이룬 섬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섬의 ‘소야(蘇爺)’란 명칭 또한 소정방의 대군(大軍)이 이 섬에 들어와 나당 연합군을 편성해 주둔했다고 해 유래됐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지금도 소야도 북망산 기슭에는 당나라 군사의 진지였다고 전하는 ‘담안’이라는 유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나라 군대가 이곳에 주둔했던 것만큼은 분명한 듯하다.

▲ 장군바위섬
이처럼 소야도는 나당 연합군을 결성해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한중 간 해상교통의 거점도서 역할을 했던 것이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수주, 이후 인주(인천)와 남양부에 소속됐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말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유배지로도 이용됐다. 충렬왕 18년(1292)에 원에서 적의 일당인 첩역속(帖亦速)을 이곳에 유배시킨 바 있다. 이후 조선 중기에 설치된 덕적진에 소속돼 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덕적면 지역을 4개 면으로 나눴다. 이때 소야면이 됐다. 이후 1909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덕적면으로 단일화됐다. 소야도는 덕적면의 하부 행정구역인 소야리가 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부천군으로 편입됐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큰 변화 없이 존속돼 오다가 1973년 7월 1일 옹진군으로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소야도 바다갈림길 큰말 전경.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조선시대 당시 국영 목장이 설치돼 있었으나 여말선초에 왜구가 덕적도를 장기간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번성하지 못했고, 버려진 섬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점차 안정을 되찾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됐다.

<글=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회원/ 삼산고등학교 교사>

정리=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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