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등산가가 산을 오르다 길을 잃었다. 날은 저물고 갑자기 눈보라까지 몰아쳤다.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하고 생각할 즈음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차가운 공기를 따라 춤을 춘다. 허름한 초가삼간이다. 탈진한 그는 문고리를 잡고 쓰러졌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니 머리맡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세숫대야와 수건. 밤새 자신을 간호한 흔적이다. 할머니는 가난한 듯 보였지만, 겨울양식을 아낌없이 내어주며 친자식 돌보듯 보살폈다.

 며칠이 지나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잠시 기세를 죽였다. 이 틈을 타 등산가는 산을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등산가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 할머니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사실 이 등산가는 큰 기업을 경영하는 기업가였다. 몇 해 전 변덕스러운 산 속 기상에 아들을 잃고 죄책감에 함께 살던 집을 떠나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새 집을 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거액의 액면가를 적은 백지수표를 봉투에 넣어 할머니에게 준 등산가는 미소를 지으며 집 문을 나섰다.

 몇 해가 지나 등산가는 다시 그 산을 오르게 됐다. 목숨을 잃을 뻔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망설였지만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할머니가 보고 싶어 길을 나섰다. 멀리 할머니 집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방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악취가 진동했다. 할머니가 혹독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이다. 아궁이를 데워줄 장작은 찾아볼 수 없었고, 쌀독도 비어 있었다. 등산가가 준 거액의 수표는 밥풀을 발라 가장 큰 문구멍을 막아 놓았다.

 민족 최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다. 때에 맞춰 어깨에 힘 좀 준다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하는 천사 코스프레가 한창이다. 자랑삼아 자신의 SNS계정에 올리기도 하고, 일부는 지면에 게재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평소 서민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이라서 역겨움과 구토감이 동시에 몰려온다. 선거 때만 되면 시장을 돌아다니며 순대나 튀김 따위를 먹는 가식덩어리들과 동급이다.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조용한데, 이들은 자랑하느라 시끄럽다. 이들의 뇌를 꺼내 산골 옹달샘에 헹군 다음 다시 장착해 주고 싶다. 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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