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이 일어난 지 꼭 7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며 상처는 아물었지만 정부의 미진한 지원 대책은 주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본보는 7년이 흐른 연평도의 아픔을 돌아보고 정부 정책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 연평도 현지 취재를 통해 살펴봤다. <편집자 주>

▲ 오연옥 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는 큰아들 황영선 씨, 인천에서 온 막내아들 황영식 씨와 김장을 준비하고 있다. 오 할머니의 집은 지난 2010년 포격으로 불에 타 새로 지어졌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 오연옥 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는 큰아들 황영선 씨, 인천에서 온 막내아들 황영식 씨와 김장을 준비하고 있다. 오 할머니의 집은 지난 2010년 포격으로 불에 타 새로 지어졌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오전부터 눈이 섞인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초겨울임에도 아늑한 햇살로 반겼던 전날 연평도 도착 때와는 딴판이다.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은 오히려 인천보다 춥지 않았다. 7년 전 화마가 덮쳤던 연평도는 바람 한 점 없는 초겨울의 아늑한 햇살로 방문객을 맞았다. 하지만 도착 17시간 만에 연평도 날씨는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변하고 있다.

숙소를 나와 연평도 곳곳을 둘러봤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고깃배들이 줄지어선 선착장을 지나 주택가에 들어서 7년 전 화약 냄새가 진동했을 포격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마을 초입에 위치한 남부리 경로당에서 박태환(75)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때 바람이 조금만 더 불었으면 연평은 이정도로 남지 않았을 거야. 골목골목마다 가스통과 기름통이 있어. 그거 터지기 시작하면 감당 못하지. 바람이 조금 만 더 불었더라면 감당 못했을 거야. 진짜 하늘이 도왔다고 봐야 해."

박 할아버지는 시내에 떨어지는 포탄을 항구에서 봤다. 아내가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연평도에서 7년 전 포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마을 담장마다 아픈 기억을 잊으려는 듯 연평도의 옛 사진이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길을 걷다 반쯤 열린 대문 안 마당에서 김장 준비를 하는 모자(母子)를 발견했다.

오연옥(80)할머니가 배추 속을 다듬으면 큰 아들인 황영선(61)씨가 소금을 넣은 물에 배추를 담근다. 오 할머니의 집은 지난 포격 이후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포격을 맞은 뒷집의 불이 옮겨 붙었다. 당시 집에 있던 오 할머니는 ‘꽝’ 하는 소리에 놀라 서둘러 대피소로 이동했다.

"저는 당시 교육을 받으러 서울에 있었어요. 포탄이 떨어졌다 길래 장난인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죠. 다음날 연평에 들어와서 며칠 동안 꼬박 발전소에 박혀 있었어요. 전쟁을 하더라도 전기는 있어야 하니까요."

황영선 씨는 연평발전소 소장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뭍에 있고 홀어머니와 함께 연평도에 산다.

"정부가 포격 이후 서해5도에 무슨 지원을 많이 한다는 것 같은데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객선 운항 시간이 정기적이지 않은 게 가장 불편하죠. 그나마 여기 산다고 주는 정주지원금 5만 원이 도움 되는 거죠. 내가 태어난 고향이니까 사는 거예요."

연평을 오가는 여객선은 수심이 낮은 소연평의 물때에 맞춰 운항 시간이 변경된다. 오전부터 사나워지기 시작한 바람은 오후가 되면서 진눈깨비까지 섞여 날린다.

인천행 배편을 기다리면서 유독 박 할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남는다.

"정부가 연평도 포격 맞았을 때 만든 게 서해5도 특별법 하나밖에 더 있어? 북한이 여기 점령하면 백령도는 자연적으로 막혀. 인천국제공항은 웃기는 소리지.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국민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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