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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승 ‘한국안보전략연구원’ 원장
북한의 반인륜적 폭압 행태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왔지만 지난 13일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북한의 폭거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오후 3시를 조금 넘은 시각에 JSA, 즉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의 한 병사가 한국 측으로 귀순을 시도했다. 당시 북한군은 이 병사를 향해 권총과 AK 소총 40여 발을 난사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 병사가 총격을 받고 군사분계선 남측 50m 지점에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확인 사살을 하듯 그의 등뒤에 또다시 총을 쏘았다.

 이 때문에 총알은 이 병사의 골반을 부수고 들어가 45도 각도로 위로 향하면서 소장을 으스러뜨리고 위쪽 복벽에 박혀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고 한다. 담당 주치의 아주대의 이국종 중증외상센터장의 소견에 의하면, 이 병사는 다행히 생명은 건질 것 같지만 그 후유증이 매우 클 것이라고 한다.

 이 병사가 왜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했는 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수사당국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밝혀지겠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체제가 싫다고 떠나는 사람들의 등뒤에서 총을 쏘아 죽이려는 북한당국의 행태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과 같이 최첨단 과학문명이 발달한 21세기 사회에서, 그것도 백주에 등뒤에서 총격을 가하는 것은 야비하기 이를 데 없는 반인륜적 만행이자 그 어떤 구실과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야만적 폭거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북한의 이런 야만적 만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바로 이곳,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에서 북한은 지난 1976년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 2명을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해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으나, 김일성의 사과로 겨우 무마됐다. 그리고 1984년에는 옛 소련인 관광객 1명이 남측으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북한의 선제 사격과 한국 측의 대응사격으로 남 측 1명, 북 측 3명의 병사가 사망하기도 했다.

 이런 북한 측의 무자비한 만행을 준열하게 규탄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분단 당시 동서독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공산체제인 동독이 싫어 자유체제인 서독으로 베를린장벽을 넘어 탈출하다가 사망한 동독인은 584명이었다. 이 중 369명은 국경수비대가 정조준한 총에 맞았으며, 베를린장벽에서만 126명이 사살됐다.

 그러나 이런 동독의 범죄행위는 그 당시에 그냥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인 1990년 통일된 이후에 그 죄과를 톡톡하게 치러야 했다. 통일 후의 독일은 동독의 과거 범죄행위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게 처리했지만, 국경수비대 발포에 연루된 사안만은 말단 병사부터 최고위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법정에 세웠다. 이 재판은 마지막 발포 희생자였던 ‘크리스 게프로이’라는 동독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를 찾으면서부터 시작됐는데, 당시 그는 베를린장벽을 넘다가 10발의 총알을 맞고 숨졌다. 1991년 뒤늦게 기소된 국경수비대원들은 법정에서 "당시 동독법과 관련 규정에 따른 것임"을 항변했으나, 재판부는 "자유를 찾아가는 동료 시민을 향해 37m라는 짧은 거리에서 상체를 정조준해 사살하는 것은 처형이나 다름없다"면서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독일은 발포 명령자를 찾기 위해 동독 공산당 문서를 샅샅이 뒤졌으며, 그 결과 1974년 당 안보담당이던 ‘에리히 호네커’가 "가차 없이 총포가 사용돼야 한다"고 발언한 것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호네커’는 물론이고 당시 국방장관과 총사령관도 살인교사죄로 중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문제와 관련해 246명이 재판에 회부돼 132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주민들의 인권을 고대 로마시대의 노예나 종처럼 짓밟으면서, 이를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하면 등뒤에서 총을 쏘아 사살하는, 이런 반인륜적 폭압행위를 자행하는 북한정권의 무자비한 폭거는 하루라도 빨리 종식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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