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영진(88)옹이 21일 인터뷰를 마치고 수원보훈요양원 로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승남 기자 nam1432@kihoilbo.co.kr
▲ 신영진(88)옹이 21일 인터뷰를 마치고 수원보훈요양원 로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승남 기자 nam1432@kihoilbo.co.kr
"우리가 그때 통일을 이뤄야 했는데 젊은 세대한테 미안해…."

한국전쟁 68주년을 앞둔 21일 수원보훈요양원에서 만난 신영진(88)옹은 최근 전 세계로 생중계된 역사적인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마음속 깊게 밀려든 회한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신 옹은 "남북이 전쟁으로 한반도에서 둘로 쪼개진 이후 반세기 넘도록 이토록 모두가 간절하게 평화를 갈망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후세들에게 ‘통일의 땅’을 물려주지 못해 들었던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고 말했다.

신 옹은 충북 영동 출생으로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춘천에서 6사단 7연대 소속 중사로 군 복무 중이었다. 그는 "6사단은 한국전쟁 때 큰 역할을 했다"며 "전쟁 발발 후 처음 치른 전투는 춘천에서 벌어진 옥산포 전투였다"고 말했다. 옥산포 전투는 민관군이 북한군의 남하를 3일간 지연시켜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전투로, 한국전쟁사 최초로 승리한 ‘춘천 대첩’으로 기록돼 있다.

신 옹은 "7연대는 그 자리에서 북한군을 막아내고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까지 진출해 태극기를 게양했다"며 "하지만 갑작스러운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후퇴가 이뤄졌다"고 한탄했다. 이어 "후퇴 과정 중에 낙오돼 인근에 있던 묘향산으로 숨어들었다"며 "묘향산에 살던 북한 주민에게 도움을 받아 국군 11명과 함께 감자를 재배해 먹으며 40일을 버티고 평양으로 집결해 다시 대대로 복귀했다"고 회고했다.

신 옹은 자대 복귀 이후 한반도 분단을 막기 위해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갔지만 북한군 기습으로 인해 오른쪽 어깨에 심한 총상을 입었다. 그는 대구 제2육군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은 뒤 4년 6개월간의 군생활을 끝내고 북한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될 무렵인 1951년 7월 15일 제대할 수밖에 없었다.

신 옹은 "지난해 ‘춘천 전투’를 함께 이끌었던 지휘관인 이대용 장군과 함께 옥산포에 가서 그곳에 심어져 있던 나무들을 봤다"며 "그때는 작았던 나무들이 이제 아름드리 나무가 됐지만 아직도 총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아물지 않는 전쟁의 흔적은 신 옹에게도 남았다. 전쟁이 끝난 지 68년이 흘렀지만 당시 입었던 총상 후유증 탓으로 지금까지도 매주 화·목요일마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이 장군 역시 지난해 11월 14일 밤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우리는 책임 완수를 못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1950년 압록강에 도달했을 때 전쟁을 끝냈어야 했다. 중공군 개입만 없었다면 우리가 젊은 세대들에게 미안함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신 옹은 "지난 4월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MDL)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서 악수를 건네는 장면을 보며 통일의 물결이 가까이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이제라도 통일이 된다면 젊은 세대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종대 기자 pjd@kihoilbo.co.kr

박종현 인턴기자 qw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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