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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30]기호일보 뿌리를 찾아서

인천 지역언론 어둠을 헤치고 새벽을 깨우다
오늘도 젊은 신문으로 ‘멈춤 없는 변화’ 추구

조현경 기자 cho@kihoilbo.co.kr 2018년 07월 20일 금요일 제4면

한국 언론(言論)은 지난날 지리한 겨울을 넘어 봄을 피웠고, 오늘날 피할 길 없는 여름의 뙤약볕을 견뎌내고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 ‘1도(道) 1사(社)’ 언론 정책으로 숱한 언론사들이 통폐합으로 사라졌다. 암흑기를 지나 198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언론자유화 정책으로 국내 언론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하지만 지금의 언론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경쟁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고 있다. 지역신문으로 태동한 ‘기호일보(畿湖日報)’의 그간 세월에도 언론의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창간 30주년을 맞아 지난(至難)했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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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교육신보.
# 인천 언론의 암흑기… 15년 동안 신문사 없던 인천

 『인천 언론계는 1973년을 잊지 못한다. 1도 1사 언론 정책에 따른 경기 3사 통폐합이라는 엄청난 토네이도가 몰려와 인천 언론을 초토화시키고 말았으니 인천 언론인들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의 발상지나 다름없고 지금까지 많은 언론사들이 나름의 경쟁 속에 건전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던 때에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사가 하나도 없게 되었으니 이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인천언론인클럽의 「인천언론사(仁川言論史)」 중 ‘3사 통폐합은 인천인(仁川人)의 굴욕’ 중.

 박정희 정권은 1973년 9월 1일 경기 3개 언론사를 통폐합한다. 졸지에 1960년대 중반 이후 인천지역 언론사로 자리매김하던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연합일보, 경기일보가 사라지고 경기신문이 새롭게 창간됐다. 인천을 포함해 전국의 11개 지역신문이 폐간됐고, 3개의 지역신문이 새로 창간되는 언론 재편성이 단행된 것이다.

 인천 언론계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지역의 언론사 3곳이 강제 통합된 것도 모자라 경기신문으로 창간되면서 인천이 아닌 수원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천을 근거로 하는 신문은 하나도 남지 않고 없어져 버렸다. 인천지역 사람들의 심정은 말로 다 못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일부는 수원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불매하는 운동까지 벌였다.

 통폐합 당시 경기매일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김형희 씨와 경기일보 편집기자였던 오세태 씨는 인천언론인클럽 회보인 ‘인천언론회보’ 제16호(2003년 8월)에서 착잡한 심경을 이렇게 술회했다.

▲ 기호일보 전신인 경기교육신보
 "1973년 8월 31일…송수안 경기매일신문 발행인과 편집국장이었던 나는 그날 오후 6시 인하공사(중앙정보부 인천분실) 지하실로 연행당했다…밤 11시 30분 군화의 둔탁한 굉음이 계단 쪽에서 울려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찍어!’ 하며 내미는 서류를 훑어 보니 3사 통합하는 데 찬성한다는 것과 9월 1일부터는 경기매일신문을 발행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다…돌아오는 차에 올라 시간을 보니 9월 1일 0시 5분이었다. 신문사에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동료들한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김형희)

 "유신의 칼날이 춤출 때마다 모든 것은 숨을 죽였다. 우리는 너무나 무기력했다…3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생각하면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날 차라리 분신이라도 했더라면 편했을 것을, 죽음의 날을 정하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열심히 죽음을 준비했던 동료들의 처절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너무나도 멍청하고 순진했던 것일까. 아니면 부러진 펜을 다시 이으려는 처절한 투쟁이었을까."(오세태)

 이렇게 인천은 신문사가 없는 도시가 됐고, 그 기간은 장장 15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 암흑기를 뚫고 경기교육신보 탄생

 길고 깊은 어두움이었으나 결국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인천에 뿌리를 둔 신문이 하나도 없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지역 언론인들은 계속 발버둥쳤다. 한쪽에서는 잡지를 발간하고 다른 쪽에서는 주간지를 창간해 인천의 소식을 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잇따른 시도 끝에 1975년 10월 10일 ‘경기교육신보(京畿敎育新報)’가 태어났다. 바로 기호일보의 전신이다.

▲ 경기교육신보 창간 1주년 1면. <기호일보 DB>
「인천언론사」는 이를 두고 언론 공백기를 맞아 모두가 허탈해 있을 때 비록 주간지이지만 경기교육신보가 창간됐다며 당시로서는 이게 유일한 탈출구였는지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경룡, 서강훈 씨 등이 주축이 돼 만든 경기교육신보는 유신 이후 전국에서 신문잡지로는 처음 창간하는 기록을 갖게 됐다. 당시에는 인천공보가 시청 회보로, 주간인천이 인천신문으로 탈바꿈하면서 이렇다 할 주간지가 없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경기교육신보는 특수 주간지이기는 하지만 인천의 끊어진 언론의 맥을 잇고 유일한 인천의 언론기관이라는 의미까지 갖게 됐다.

 이 신문은 ‘교육 총화의 기수’를 사시(社是)로 내세웠다. 또 창간사를 통해 ‘민족 교육이 인간 회복을 위한 소망스러운 작업으로 생활화하는 날 사회 부조리는 불식되리라고 확신한다’, ‘변화하는 사회적 요청에 따라 향토 교육 문화의 공기로서 향도적 역할을 맡아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 일간지 등록 변경을 위해 문공부와 주고받은 서류
 지역인들은 환영했다. 특히 문화단체들은 그간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어 반가워했다. 인천에서 뜻 있는 행사들을 하더라도 보도해 주는 신문이 없어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기교육신보에 연락해 보도를 요청해 신문의 대안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 경기교육신보⇒기호신문⇒기호일보

 1987년 ‘6·29 선언’으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받게 됐다.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인간 존엄성 존중 및 기본 인권 신장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등이 담긴 선언을 한다. 그리고 이 선언에 함께 담긴 ‘자유언론의 창달’이 오늘날의 기호일보를 있게 했다.

▲ 기호일보 사옥.
 6·29 선언 이후 1년이 흐른 1988년 7월 20일 인천시 중구 중앙동 1에서 ‘기호신문(畿湖新聞)’이 태어났다. 경기교육신보의 주축이었던 서강훈 씨가 중심이 돼 같은 해 5월 25일 공보처로부터 정기 간행물 설립 등기증을 교부받고 곧이어 7월 20일 창간호를 발행한 것이다.

 기호신문이 이처럼 신속하게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경기교육신보의 시설과 인적 자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창간사에서도 언급된다. 기호신문은 "유신 시기 벙어리 도시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꽉 막힌 숨통을 다소 열기 위해 발행한 경기교육신보라는 주간지를 바탕으로 쉽게 일간지를 만들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인천 언론 공백 15년의 긴 터널을 벗어나 지역 언론사를 세운 만큼 언론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다부진 포부도 내놓았다.

 "우리는 이 창간호를 내면서 딱 부러지게 애독자 여러분 앞에 약속해 둘 것이 하나 있다. 기호신문은 누가 뭐라 해도 일간신문이 꼭 지켜야 하는 성역과도 같은 신문도에 어긋난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무슨 뜻이냐 하면 기호신문은 불의의 강자 앞에 강할 것이고 정의의 약자 앞에 약해질 줄 아는 신문 본래의 영역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 제5회 기호 참일꾼상 시상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수상자들. <기호일보 DB>
목소리의 박자가 높을수록, 빛깔의 농도가 짙을수록 신문도에 한층 더 충실한다는 대목을 강조하느니 만큼 우리에게 헛된 약속이란 있을 수 없다. 영원히 퇴색되지 않는 빛깔, 하늘빛 짙푸른 기상으로 서릿발 같은 차가움을 곁들이면서 창업의 정신과 창간호의 다짐을 착실히 지켜 나가려고 한다."

 기호신문은 제호(題號)처럼 수도권(옛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경인지역의 중추적인 언론으로 소명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공정, 책임, 정론, 진실을 사시로 내세우고 일간지를 제작하는 편집1국과 월간 화보 ‘수도권’을 만드는 제작2국을 뒀다. 여기에 총무국과 업무국, 공무국 등으로 조직을 줄이고 취재 인원도 소수 정예로 시작했다. 창간 당시 임원진은 발행·편집 겸 인쇄인 서강훈, 주필 겸 편집국장 박민규, 총무이사 이강세, 기획이사 문형기, 논설위원 김영호·채훈·김태풍·장덕환, 편집위원 편집국 차장 김낙준이었다.

▲ 기호일보 체육대회
 기호신문은 다른 주간지와의 구분을 위해 창간 4개월 만인 1988년 11월 28일 ‘기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이후 시간이 흘러 2008년 2월 15일 현 미추홀구 숭의동 사옥으로 이전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같은 해 2월 18일 ‘제26차 정기주주총회 및 이사회’를 열고 서강훈 대표이사 회장·발행인과 한창원 대표이사 사장·편집인을 선임했다. 또 신문 지면과 함께 뉴미디어 환경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16년 10월 10일 ‘기호TV’를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 기호TV 홈페이지
한창원 사장은 "기호일보는 미래지향적인 사고와 젊은 신문으로서의 창조적인 발전을 모토로 경인지역에 꼭 필요한 언론이 되기 위해 오늘도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전국에서 제일가는 모범적인 지역언론의 모델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조현경 기자  cho@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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