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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심은 운다

김종국 기자 kjk@kihoilbo.co.kr 2018년 08월 14일 화요일 제10면

빌라 층계 복도에 있는 센서등은 오늘도 켜지지 않았다. 이럴 경우 A씨는 주머니에 챙겨 둔 작은 손전등으로 계단을 비추곤 했지만 이날은 감각적으로 어둠을 헤치고 쏜살같이 계단을 올라갔다. 층계참에는 방금 꺼진 듯한 담배 꽁초며 빈 술병과 쓰레기, 살림 집기들이 널브러져 있다. 산단이나 전철역을 끼고 있는 가난한 빌라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거의 다 왔다. 한 층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한 그는 4층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머리를 풀어 헤친 여성이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계단에 앉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괜찮으시냐’고 말을 걸어 볼까 그는 잠시 생각했지만 야심한 새벽 낡은 빌라 마당에서 300개의 우유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시동 켜진 오토바이 걱정이 앞섰다.

 그녀를 피해 그는 5층 철문에 매달린 우유바구니에 우유를 집어 넣고 한달음에 계단을 내려왔다. 새벽 2시, 우유배달부 A씨의 오토바이 앞과 뒤, 양옆에는 이날 배달해야 하는 우유들이 플라스틱 상자 5개에 담겨 아슬아슬 매달려 있다. 제대로 된 아파트 단지 하나 없는 원도심의 빌라촌과 주택 단지는 우유 배달 인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있으나 마나 한 희미한 주황색 가로등을 의지해 찾아간 집들에는 번지수도 적혀 있지 않고 빌라 이름은 페인트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대문은 아무렇게나 열려 있고, 노숙인이나 사나운 길고양이를 어둠 속에서 거의 매일 만나야 한다.

 폭염 속에서도 캄캄한 원도심의 주택가와 빌라촌을 오가다 생길 수 있는 몸의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는 긴 옷을 입어야 하고, 사람 하나 다닐 수 있는 비좁은 골목길에서 오토바이와 함께 넘어지기도 일쑤다. 포장된 도로 곳곳은 움푹 패어 있고 담장은 허물어졌으며, 괴기스러운 비명이 텔레비전 소리와 함께 반지하 방에서 들려온다. 치안도, 안전도, 불빛도 없는 이곳에서 배달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그의 몸무게는 10㎏이 넘게 빠졌다. 이제는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귀신이 서 있는 것 같은 환영까지 그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저 멀리 신도시는 수려한 야간 경관으로 날로 오색찬란해지고 물길, 뱃길, 찻길, 사람길은 차고 넘기게 첨단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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