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폭염과 태풍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2018년 08월 24일 금요일 제10면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부교수.jpg
▲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
최장 기간 지속된 폭염 일수와 열대야 일수, 최고기온과 가장 높은 여름철 최저기온 등 올 여름 무더위는 여러 기상관측기록을 갈아치웠다. 정말 더운 여름이다.

 그런데 역대 최고의 폭염이라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근대기상관측 111년 이래’라는 표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이는 1907년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 그해 농상공부 소관 측후소 관제 공포가 있었고, 서울 등지에 관측소가 설치됐지만, 근대기상관측의 시작은 이보다 훨씬 앞선 1883년의 일이다.

 인천, 부산, 원산해관에서는 통관물품에 대한 징세업무 외에도 선박의 안전항행을 위해 기상정보를 제공했다. 해관 건물 옆에는 풍향을 알리는 높은 깃대를 세웠다. 1884년에는 인천항과 원산항 해관 구내에 기상관측계기를 설치해 보다 과학적으로 기상을 관측했다. 인천해관 관측소는 1885년에 일어난 화재로 전소돼 다음 해인 1886년에 재건되는 비운을 겪으면서도 기상관측을 이어나갔다. 1898년 1월에는 러시아가 월미도에 기상관측소를 설치하고 항해하는 선박에게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신호장치를 운용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을 치르던 일본이 인천과 부산에서 근대기상관측을 시작한 1904년은 이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근대 개항기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무더위 관련 단어는 폭염, 전염병, 물놀이, 익사, 도열병, 가뭄 등이며, 흥미로운 내용도 많다. 1935년 8월 7일자 기사는 1만 명이 넘는 피서객(당시 표현은 ‘납량객’)이 인천으로 몰려와 사람사태가 일어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1935년 인천 인구는 8만2천997명이었다. 사망자도 급증해 1939년 여름 인천지역 하루 평균 사망자는 15명으로 평소 7~8명의 2배였다. 무더위로 수도관이 파열되고, 더위 먹은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소식도 있다.

 지금은 전기요금 누진제와 전력예비율이 국가적 관심사이나, 1930년대에는 수도사용량 증가가 폭염이 촉발한 사회문제였다. 1936년 당시 경성부는 인천부와 계약을 맺고 인천부 소관 노량진 정수장에서 물을 끌어다 용산, 아현동 일대에 수도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여름 인천지역 수도사용량 급증으로 가용량이 줄게 되자 급하게 뚝섬정수장으로 공급선을 변경했다.

 1938년 7월 31일, 8월 1일 양일간 인천부 하루 평균 수도사용량은 6천345㎥로 5년 이래 최고를 기록했다. 당시의 정확한 상수도 보급률을 확인할 수 없어 대략 50% 정도라고 가정하면 1인당 140L 정도의 물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2016년 인천시민 1인당 하루 수도사용량은 304L이다. 당시에는 섭씨보다 화씨를 더 많이 사용했던 점도 이채롭다.

 조선시대에도 무더위는 국가대사였다. 임금과 신하가 모여 공부하는 경연이 몇 달간 중단되기도 했다. 특히 감옥에 갇힌 죄인에 대한 기록이 많다. 무더위 때문에 전옥서에 갇혀있던 경범자를 석방했으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바로 처결하지 않고 오래 지체한 의금부 당상 등을 추고하라는 전교가 내려지기도 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니 태풍이 문제다. 무더위를 물리쳐줄 태풍을 기다린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기이한 상황까지 내몰렸지만, 막상 태풍이 올라오니 걱정이 크다.

 우리나라가 이미 아열대 기후에 접어들었다 하니 지금까지 경험했던 더위보다 심각한 무더위가 몰려올 것이고 엄청난 피해를 몰고 오는 태풍도 여전히 한반도를 강타할 것이다. 치밀한 재난대책으로 좀 더 편안한 여름을 보내고 싶다.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저작권자 ⓒ 기호일보 (http://www.kihoilbo.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