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코펜하겐에서 열린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덴마크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끝으로 귀국길에 올라 7박 9일간의 유럽순방 일정을 마무리했다.

문 대통령은 프랑스 파리를 국빈방문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데 이어 이탈리아·교황청을 공식방문하고, 벨기에에서 열린 아셈(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등 숨 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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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대통령, 프란치스코 교황과 이동
(바티칸=연합뉴스) = 교황청을 공식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현지시간) 바티칸 교황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환담한 뒤 교황이 선물한 묵주 상자를 들고 이동하고 있다.
이번 순방의 최우선 목적은 지난달 3차 남북정상회담과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진전을 보인 한반도 비핵화 양상을 설명하고, 항구적 평화 정착을 앞당기려는 한국 정부의 정책과 노력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산하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그 일환으로 3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을 북한으로 초청하고 싶다고 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뜻을 교황에게 직접 전했다.

교황이 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김 위원장의 초청을 사실상 수락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구축을 추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유럽순방의 최대 성과로 평가받을 만하다.

문 대통령은 아울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와 영국 정상을 차례로 만나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언급, 국제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이슈화했다.

다만, 아셈에서 각국 정상들은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위한 구체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아 대북제재 완화에 필요한 국제적 여론을 확보하는 데 적잖은 노력이 소요될 것임을 짐작케 했다.

◇ 성큼 다가온 교황 방북…국제적 비핵화 지지 여론 확산 기여할 듯

프란치스코 교황은 18일 교황청을 공식방문한 문 대통령을 만나 "북한의 공식 초청장이 오면 나는 갈 수 있다"면서 "한반도에서 평화프로세스를 추진 중인 한국 정부의 노력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했다.

전 세계 화해와 평화의 메신저로 지대한 역할을 해 온 교황이 사실상 방북 의사를 밝힘에 따라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구상이 어떤 식으로든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미국·쿠바 국교 정상화, 콜롬비아 평화협정 타결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교황이 마지막 냉전 지대로 남은 한반도에서 전하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2차 북미정상회담의 성사 여부에 관심이 쏠린 상황에서 나온 교황의 방북 의지는 더 큰 메시지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교황의 방북은 일단 평화체제를 받아들이겠다는 북한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북한이 '정상국가'로 변모하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아울러 국제사회의 분쟁 해결에 기여해 온 교황의 뜻이 전 세계에 퍼져 문 대통령의 평화체제 구상에 대한 지지기반이 확산한다면 비핵화를 실현하라는 국제적 여론을 미국 역시 등한시하기 어렵다는 점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교황 방북을 성공적으로 중재했지만 문 대통령의 역할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을 전망이다.

교황의 해외 방문은 개별국가 정상의 초청과 함께 그 나라 가톨릭 대표 단체인 주교회의 차원의 초청이 있어야 가능한데, 천주교 사제가 없는 북한에는 주교회의가 없다. 즉, 북한의 사전 정지 작업이 선행돼야 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교황의 방북을 최종적으로 성사시키기 위해 교황청과 북한 사이의 '중재자' 문 대통령의 역할은 계속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 안보리 상임이사국 만나 공론화했지만 '갈 길 먼' 대북제재 완화

문 대통령은 순방 기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의 잇단 정상회담에서 대북제재 완화 문제를 논의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대북제재 완화의 키를 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는 점에서 두 나라 정상과의 회담은 교황 면담과 더불어 유럽순방의 결과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문 대통령은 두 정상과의 회담에서 북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핵화를 진척시키면 제재완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동안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발맞춰 미국이 취해야 할 상응조치의 하나로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강조해 온 문 대통령이 또 하나의 상응조치로 대북제재 완화를 꺼내 이를 공론화한 것이다.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한 데 이어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실험장 등을 폐기하겠다고 약속한 데다 미국의 상응조치가 있으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겠다는 용의를 밝힌 만큼 지금이 대북제재 완화를 논의할 적기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기존의 '연내 종전선언' 목표에 더해 북한이 취하고 있는 비핵화 조치가 가지는 의미를 부각해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환기함으로써 미국의 상응조치를 신속히 끌어내는 데 문 대통령의 역량이 집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대북제재 완화와 관련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려면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는 게 중론이다.

19일 폐막한 제12차 아셈 의장 성명에서 아시아·유럽 정상들은 북한에 대해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모든 핵무기, 여타 대량파괴무기, 탄도 미사일 및 관련 프로그램과 시설을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으로 폐기(CVID)할 것"을 촉구했다.

안보리 제재 결의의 이행을 명시적으로 약속한 것은 대북제재 완화 논의에 본격적인 물꼬가 트이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미일중러 이어 유럽서 '비핵화 세일즈'…지지기반 확대

문 대통령은 유럽순방 전인 12일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은 지금까지 북한의 비핵화를 평화적으로 이루자는 우리 정부의 목표를 지지해주셨다"면서 "유럽이 지속해서 그 프로세스를 지지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지금까지의 비핵화 과정이 남북미와 함께 주변 열강인 중국·일본·러시아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진행된 데 따른 한계를 어느 정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상응조치의 양대 축 중 하나인 대북제재 완화에서 진전을 보려면 이들 국가 외에 국제사회에서 미국에 대응하는 영향력을 지닌 유럽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인 만큼 이번 순방의 또 다른 초점도 자연스럽게 그에 맞춰졌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영국과의 정상회담, 아셈 의장성명 등에서 CVID가 거론된 탓에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는 데 아쉬움을 남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독일·이탈리아·덴마크 등과의 정상회담에서 대북 정책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다자외교 무대인 아셈에서 남북·한미 정상회담에 따른 비핵화 국면의 진전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각국 정상의 이해도를 높였다.

비록 대북제재 완화에 필요한 명시적 협력을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유럽의 상당수 국가가 북한과 수교 관계를 맺고 교류를 지속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순방을 계기로 동북아 새 질서 정립에 대한 이들의 협력을 끌어낼 가능성을 키운 점은 소기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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