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아가나(AGANA)
경/위
북위 13.28˚ / 동경 144.47 ˚
인구
약 15만 명
면적
549 ㎢ (우리 나라의 거제도와 비슷한 크기의 섬)
언어
영어, 차모로어
괌의 공용어는 영어다. 하지만 공용어인 영어와 함께 원주민의 언어인 차모로어도 사용되고 있으며, 관광객의 증가와 함께 일어, 한국어도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차모로어
가족간의 대화에서는 차모로어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차모로어는 고대 차모로어에 스페인어와 필리핀의 타갈로그어가 혼합된 형태로 되어 있다. 스페인 통치 시대의 영향을 받은 탓에 알파벳은 스페인어와 거의 같으며, 발음도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 된다. 인사말을 비롯한 간단한 표현 중에는 지금도 스페인어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아왔던 괌의 특수성을 잘 드러내 준다.

민족
괌의 인구는 약 15만 명인데, 차모로계 55%, 북미인 20%, 필리핀계 11%, 기타 14%의 구성이다. 한국인도 약 7,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종교
종교적으로는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카톨릭 신자가 많다. 그러나 개신교를 믿는 주민도 늘고 있으며, 괌 전래의 신앙인 타타무나라는 토신(土神) 신앙도 남아 있다
지리
위치
괌은 마리아나 제도 최남단에 있는 섬이다. 우리 나라와는 3,880km 떨어져 있다. 미국령에 속하지만 자치를 인정받은 준 주(洲)여서, 괌의 주민들은 대통령 선거와 피선거권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미국 시민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인정받는다.

자연 환경
괌은 길이 48km, 폭은 좁은 곳이 약 6.4km, 넓은 곳은 20km 정도이고, 섬 주위는 온통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다. 산호초를 제외한 면적은 약 549㎢, 우리 나라의 거제도와 비슷한 크기다. 중부와 북부는 산타 로사 산과 마타구악 산의 화산층에서 볼 수 있는 석회암 지질이고 남부는 길게 뻗은 사화산 산맥이 내륙 계곡과 해안을 가로지르고 있다. 남부에는 괌의 최고봉인 람람 산(396m)이 있다. 또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구인 마리아나 해구(수심 약 11,033m)가 괌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 옷차림
열대성 해양기후로 연간 온도 변화가 거의 없는 대신 7~11월이 우기, 12~6월까지가 건기로 구분된다. 평균 기온은 26℃로 지내기 편하다. 하지만 갑작스레 장대비가 쏟아지다가 곧 맑은 하늘을 드러내는 열대 특유의 소나기인 스콜 현상을 종종 볼 수 있다. 8~10월은 태풍 시즌이다. 근해에서 태풍이 발생하기 때문에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으며 몇년에 한 번씩 많은 피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태풍 시즌을 피해 여행 계획을 잡는 것이 좋다.

옷차림
옷차림은 여름 날씨를 기본으로 하고 건기나 태풍이 부는 시기에는 카디건 등을 준비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샌들이 사계절 내내 무난한 복장이다. 비치에서는 보다 자유로운 복장도 가능하지만 레스토랑 등에서는 긴팔 셔츠와 긴 바지, 구두 등 격식 있는복장을 요구하기도 한다. 또 햇살이 따가우므로 모자와 선글라스, 자외선 차단 크림은 꼭 준비해 가야 한다

역사
차모로족의 시대
- 차모로족의 뿌리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괌 지역에는 차모로족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차모로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민속학자들간에 만족할 만한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은 차모로족이 인도 말레이시아인의 후손이라는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력한 근거는 차모로족의 언어와 문화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및 필리핀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 차모로족의 문화
차모로족은 바다 생활에 매우 익숙하며, 정교한 공예 기술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집과 카누를 잘 만들 뿐만 아니라, 수직공예 및 도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한때 이들은 부족을 이루어 엄격한 계급제도 아래 체계적인 사회를 이루며 살기도 했다. 지금도 마이크로네시아 각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라테 스톤(Latte Stone:접시 모양의 바위가 얹혀진 돌기둥 형태로 된 차모로 유적)은 이 시기 차모로족의 종교지도자가 살았던 주거지의 흔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때때로 있었던 전쟁을 제외한다면 수천년에 걸쳐 차모로족은 세상과 동떨어진 채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차모로족에게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생활상에 대해서 남겨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서구인의 진출
수세기 전부터 괌을 비롯한 마이크로네시아 제도의 여러 섬들은 많은 정복자와 상인, 모험가들에게 새로운 세계로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괌이 서구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를 한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에 의해서였다. 마젤란은 1521년 3월 괌 서남쪽에 있는 우마탁에 도착했다. 마젤란은 괌의 원주민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행복에 겨워 잘 웃으며, 생활의 충만을 노래하거나 옛날 이야기를 즐기고, 춤과 사냥, 낚시로 하루를 보낸다.”
- 스페인의 점령
1565년 스페인의 미구엘 로페즈 데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spi)는 괌을 점령하고 스페인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차모로인들을 굴복시키기까지는 그 후로도 25년이나 더 걸리고 난 뒤였다. 스페인의 통치는 이후 300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 유럽 국가들의 점령
유럽의 탐험과 영토 확장이 한창일 때 스페인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괌 역사의 일부분을 장식했다. 18세기초 영국 해적들은 스페인의 상선을 약탈하기를 일삼았는데, 이들 가운데 몇몇 해적들은 괌을 자신들의 식량 조달 기지로 삼기도 했다. 유명한 해적, 우즈 로저스(Woodes Rogers)는 괌에 1주일간을 머물면서 후안 안토니오 피멘텔(Juan Antonio Pimentel) 총독으로부터 식량을 빼앗기도 했다. 또 다른 해적 존 클립턴(John Clipperton)은 집과 스페인 배를 불태워 버리겠다고 협박하며 식량을 요구했으나, 스페인인들의 공격을 받고 쫓겨났다.

- 서구 문화의 유입
필리핀과 멕시코라는 스페인 양대 식민지 사이에 위치한 괌은 일찍부터 금과 상품을 가득 실은 스페인 무역선의 경유지로 자리 잡았다. 괌은 본래 강한 모계 사회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로 여인들에 의해 차모로 문화, 언어, 음악, 무용, 풍습 등이 보존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1668년 예수교 선교사들이 와서 카톨릭과 함께 유럽 문명을 전파함에 따라 괌의 주민들은 생활상의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차모로인들에게 옥수수 농사, 목축, 서양 옷 만드는 법, 가죽을 무두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카톨릭을 전파하는 데 힘을 쏟았다. 차모로인들의 생활에 카톨릭이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로부터였다.

미국과 일본의 지배
- 미국의 지배
스페인의 300년 간의 지배는 1898년 미국 스페인 전쟁으로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난 뒤 맺은 조약에 의해 미국이 스페인을 축출하고 필리핀과 괌에서 지배권을 획득한 것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는 괌을 미국 해군의 관할하에 두었고, 해군 대령이었던 리어리(Richard P. Leary)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미 해군의 관리하에서 괌의 농업, 공공위생, 세제, 교육, 토지 관리 등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 1·2차 세계대전 중의 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고 괌도 거기에 따랐다. 하지만 1914년 12월 독일 전함 코모란(Cormoran) 호가 아프라 항에 진입하여 식량과 연료를 요구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 배와 선원들을 억류하는 것으로 일단락지었지만 섬을 방위하고 있던 미군보다 많은 373명의 독일군 포로의 존재는 괌의 안전에 위협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북마리아나 군도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이 괌을 침공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급변하는 상황에서 미군은 괌에 억류되었던 포로들에게 항복을 강요하는 등 압박을 가했지만, 독일 포로들은 전함 코모란 호를 침몰시킴으로써 공식적인 항복을 거부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미국은 괌에 미군의 연료공급기지를 세우는 등 괌을 전략 요충지로 삼게 되었다.

- 일본군의 점령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2월 10일 괌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냈다. 1942년 통치권이 일본 해군으로 넘어감으로써 다소간 생활 조건이 향상되었지만, 이후 31개월간 지속된 일본군 점령 기간 동안 괌 주민들은 일본의 혹독한 군사통치를 경험하게 된다. 일본군은 괌 지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어른과 어린이 모두에게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동시에 섬 요소요소에는 일본군의 진지가 구축되었다.

- 미군 상륙과 재귀속
1944년 7월 21일 5만 5000여 명의 미군이 일시에 아가트(Agat)와 아산(Asan) 등지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미군에 대항했지만, 결국 궤멸당하고 말았다. 괌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가장 잘 계획되고 빈틈없이 수행된 작전이라는 평을 얻었을 만큼 미군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괌을 재탈환한 미국은 1946년 5월 30일 다시 해군 정부를 수립했다. 괌은 다시금 평화를 찾았고, 1950년 트루먼 대통령은 괌을 자치령으로 선포했다. 그와 함께 괌 주민들은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괌 최초의 민간인 지사로는 칼턴 스키너(Calton Skinner)가 지명되었고, 1971년 역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선거에 의해 카를로스 카마초(Carlos B. Camacho)가 지사로 선출되었다.

괌의 현재와 미래
1962년 미 해군은 괌 지역에 대한 보안 통과안을 해제했다. 이로써 괌은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될 관광 산업에 중점을 둘 수 있게 되었다. 이어 1967년에 팬암 항공이 일본과 괌 간을 취항하면서 괌은 본격적인 관광산업에 돌입했고 관광객의 유치에 힘입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더불어 괌에 주둔해 있는 상당수의 미군들 또한 괌 경제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한국인의 본격적인 괌 진출은 1969년 건설업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재 대다수 교포들은 건축업, 식당, 슈퍼마켓, 숙박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 수도 매년 50% 이상 급증하면서 연간 18만 명(괌 관광객의 15%) 이상이 괌을 방문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이크로네시아 세계
스페인의 유적, 일본의 잔재, 미국의 문화…. 마이크로네시아의 섬들에는 이런 다양한 표정이 남국의 쾌활함과 어울린 채 생활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 역사, 문화, 요리 등을 통해 배경에 접근해 가노라면 여행은 더욱 흥미있어질 것이다.

태평양의 섬들
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섬들 가운데 동경 180도 동쪽의 하와이, 뉴질랜드, 이스터 섬을 연결하는 지역이 폴리네시아(다수의 섬들이라는 의미)다. 그 서쪽 적도에서 남쪽의 뉴기니아와 솔로몬 제도가 멜라네시아(검은 사람들이 사는 섬들이라는 의미)이고, 적도를 끼고서 멜라네시아의 북쪽에 해당하는 것이 ‘작은 섬들’을 의미하는 마이크로네시아로, 마리아나 제도, 캐롤린 제도, 마샬 제도 등으로 이루어진 섬들의 총칭이다.

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로타, 티니안을 포함한 마리아나 제도에는 기원전 2,000~1,500년 전부터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선조는 문화나 언어상의 유사점으로 보아 현재의 말레이시아 방면에서 카누를 타고 건너왔다고 생각되는데, 문자로 기록된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마리아나 제도가 유럽인에 의해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대항해시대의 일이다. 1521년, 포르투갈인 마젤란이 거느린 탐험대가 마리아나 제도에 상륙했다. 괌에 상륙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던 그가 닻을 내린 지점은 괌 남부의 우마탁 만이라고 한다. ‘평화로운 바다’를 의미하는 태평양(Pacific Ocean)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마젤란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도 허무하게 그의 상륙을 시작으로 마이크로네시아는 식민지 지배를 맞게 되었다. 스페인은 1565년에 마리아나 제도의 영유를 선언했다. ‘마리아나’란 이름은 당시 스페인 여왕 마리아나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선교사 파드레 비토레스가 명명한 것이다.

세계 대전과 마이크로네시아
1898년의 미국 스페인 전쟁 후 괌의 통치권은 미국으로 옮겨졌고, 제1차 대전 후에는 일본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미국이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다시금 미국의 지배를 거쳐 자치를 획득했다. 1978년에 괌을 제외한 마리아나 제도는 북마리아나 연방을, 1979년에 캐롤린 제도의 얍, 포나페 등은 마이크로네시아 연방을 결성했고, 또 1994년에 파라오 공화국이 독립했다

문화
수차례에 걸친 강대국들의 정복과 전쟁,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괌의 전통과 풍습은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 선사 시대에 형성되어 역사의 흐름 속에 다져진 괌의 문화는 이제 활기차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카톨릭 전파
17세기 이후 괌에 모습을 드러낸 카톨릭 성당들은 마을의 중심이 되어 왔다. 지금도 각 마을마다 주민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성자가 있으며, 그 성자의 기념일에는 마을 주민들이 참가하는 성대한 잔치(피에스타)가 열린다. 대부분의 종교 의식에는 스페인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는 세례 파티, 판당고(결혼식), 9일 기도, 장례식 그리고 추모 묵주 기도 등이 있다. 이러한 스페인의 영향은 메스티자(Mestiza)라고 불리는 여인들의 옷과 남부의 건축물 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음악과 노래
괌 주민들의 삶에서 음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괌의 전통 악기로 벨렘바오투얀(Belembaotuyan)이란 악기가 있다. 이는 호리병 박과 팽팽한 밧줄로 만든 것으로 독특한 음색을 들려 준다. 또 칸탄 차모리타(Kantan Chamorrita) 노래는 수세기 동안 괌에서 살아온 차모로인들이 즐겨온 대표적인 오락이었다. 전통적으로 이 노래는 수직 공예, 옥수수껍질 벗기기, 망 낚시 등 장시간 계속되는 단체 노동에서 여러 사람이 서로의 흥을 돋우기 위해 불렸다. 오늘날까지도 음악은 축제나 결혼식 또는 가정에서의 파티 등 각종 사교 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는 빠지지 않고 차모로의 노래가 불려진다.

전설과 옛이야기
괌에는 다양한 전설과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어린이들은 지금도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마을의 귀신이야기나 슬픈 사연을 간직한 연인들의 이야기, 물고기로 변한 아름다운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정열적인 춤과 노래도 대부분 이러한 전설의 주인공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전통 예술
괌의 전통 예술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차모로 문화촌에서는 수직공예, 조각, 대장장이의 작업 광경 등을 지켜볼 수 있다. 판다너스(Pandanus) 나무나 코코넛 나무껍질, 천연 직물로 짠 여러 가지 공예품들이 있으며, 조각공들은 이필나무, 망그로브, 코코넛, 파고 나무 등을 이용해 테이블, 기념패, 인형, 동물상 등을 만들기도 한다. 이들 전통 공예는 실습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대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전통 요리
수세기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 아래서 괌은 각 민족의 다양한 요리를 효과적으로 발달시켜 왔다. 유럽, 미국, 아시아, 마이크로네시아 등지를 포함한 다국적 요리는 마을 축제 때나 파티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축제 때 섬 주민들은 레드 라이스(붉은 빛을 띤 밥), 새우파이, 판싯(Pancit, 필리핀식 국수), 갈비구이, 닭요리, 코코넛 밀크로 조리된 타로(Taro) 잎 등 고유의 요리를 풍성하게 마련한다. 이 밖에도 켈라구엔(Kelaguen)이라는 별미 요리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켈라구엔은 반쯤 익힌 닭고기에 레몬즙·말린 코코넛 과육·고추 등의 재료를 얹은 후, 간장·고추·다진 양파 소스에 절여 맛을 낸 것이다. 여러 가지 풍성한 요리를 즐긴 뒤 괌 사람들은 라임가루를 뿌린 베텔 넛(Betel Nut)을 후추잎에 싸서 씹는 것으로 식사를 마친다.

주거 환경
괌의 차모로 빌리지는 옛 차모로인의 가옥이 재현되어 있는데, 계급에 따라 집을 만드는 방법도 차이가 뚜렷했다. 상류 계급의 가옥은 내부에 사다리를 놓은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서민의 집은 초가집으로 지면에 세웠다. 또한 생활용품에도 차이가 있어서 상류계급은 판다너스 잎을, 서민은 야자 잎을 짜서 바구니나 그릇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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