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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과 6·18 반공포로 자유 석방

장순휘 정치학박사/문화안보연구원 이사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2019년 06월 19일 수요일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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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순휘 정치학박사
6월 18일이 어떤 날인가를 기억하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날은 1953년 6월 18일 00시에 있었던 ‘반공포로 석방의 날’이다.

 이날은 한국전쟁사에만 있는 특별한 역사의 날이기도 하지만 기억하는 행사는 없다. ‘전쟁포로(POW : Prisoner Of War)’라는 것은 사전적으로는 ‘전투에서 사로잡힌 적의 군사’이다.

 포로에 대한 실질적인 의미를 파악하려면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이하 제네바 협약)’을 살펴봐야 한다. 제네바 협약은 1929년 7월 27일 제정돼 1949년 8월 12일 조인됐고, 1950년 10월 21일 발효됐다. 우리나라는 1966년 8월 16일(조약 제217호) 공식적으로 발효했다. 제네바 협약 제1편 총칙 제4조는 ‘①충돌당사국의 군대 구성원 및 그러한 군대 일부를 구성하는 민병대 또는 의용대 구성원’으로서 적의 수중에 들어간 자를 ‘전쟁포로’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북한군과 중공군 사이에 발생한 쌍방의 구성원을 ‘전쟁포로’로 적용할 수 있다.

 제네바 협약 제4편 제2부(적대행위 종료 시 포로 석방과 송환) 제118조에는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이나 중공군을 휴전협정 체결 후에 억류국이 포로 소속국으로 지체없이 송환하도록 규정된 것이다. 그런데 공산포로들 중 대단히 많은 숫자가 북한 또는 중공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송환거부’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공산권으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의 포로를 ‘친공포로’라 하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반공포로’하고 부르게 된 불가사의한 포로집단이 발생한 것이다.

 한마디로 ‘반공포로’라는 의미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포로’라고 할 수 있는데 공산주의 북조선과 중공을 위해 싸웠던 군인들이 그 공산주의를 배신하는 꼴이 된 것이다.

 공산군 포로 자신들이 참전해 싸웠던 그들의 조국을 버리고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로 돌변한 사태는 고향에 부모형제, 일가친척, 처자식을 두고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일은 사상문제와 인간본능을 초월한 ‘자유(freedom)’라는 인도주의적 기본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외치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반공포로의 집단적 발생은 공산군 측을 당황케 만들었고 국제적인 망신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래서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포로교환협상’이 난항을 반복했고, 정전협정 체결까지 2년 여간 걸림돌로 작용했다.

 다행스럽게도 유엔군 측은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면서 반공포로를 강제적으로 송환하려 하지 않았고, 제네바 협약문에서 ‘포로교환은 의무적이 아니다’라는 해석과 ‘전쟁포로는 관리하는 국가의 주권에 속한다’는 재해석을 적용해 공산 측의 무조건 전원 송환 요구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2만7천388명(6·25사변후방전사/육본)의 반공포로들은 북한 공산 치하로 끌려가서 집단학살을 당했을 것이다. 이런 상상만 해도 1953년 6월 18일 단행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조치가 얼마나 위대한 결정이었는지를 알 것이다.

 1953년 들어서면서 미국과 유엔군 측의 전쟁 휴전협상이 속도를 내면서 졸속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 한국정부는 "휴전회담을 반대하며,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강력한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힘이 없었다. 당시 포로교환 문제에 유엔군 측이 공산군 측에 끌려가는 양상인 것을 감지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의 결심을 하고, 반공 포로에게 자유의 삶을 주려고 탈출시킨 운명의 날이 바로 6월 18일이었던 것이다.

 당시 포로수용소는 미군 병참관구사령부(KCOMZ)가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한국군은 경비부대와 헌병을 파견해 수용소의 외곽경비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OPCON)이 유엔사에 이양됐기 때문에 대통령의 명령이라도 포로 석방은 불가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직접 내린 석방명령이 전격적으로 단행된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행위로 이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도 걸린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6월 18일 00시 반공포로 석방조치는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에 대한 인도주의적 결심이 단행된 전쟁에 핀 아름다운 꽃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민족의 큰 지도자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결단이 맞다고 역사는 평가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밤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인민군 해방구’였다. 미군의 경계순찰을 피해서 24인용 텐트 안에서는 인민재판이 수시로 열렸고, 반공포로로 지목된 포로들은 무자비한 폭력과 잔인한 체벌로 초죽음이 됐거나 시체가 됐으며, 심지어 사체는 통조림으로 급조된 칼로 난도질이 돼서 대변구덩이에 몰래 버려졌다는 것이다.

 평시에도 친공포로와 수시로 충돌했고, 투석전과 비방전 등 그야말로 거제도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전장터였으며, 반공포로들이 강제송환 반대를 위해 혈서진정, 분신자해 등 자유를 찾고자 투쟁했다는 증언을 본다면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로운 삶이 반공포로에게는 죽음으로 싸워서 얻어야 했던 고귀한 가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자 한다. 워싱턴 한국전기념비에는 ‘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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