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현린 주필
원현린 주필

유엔이란 무엇인가. 유엔헌장에는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가 유엔의 첫째 목적이라 천명하고 있다. 유엔헌장은 유엔의 헌법이다. 이러한 유엔헌장이 효력을 상실, 무색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국제 현실이다. 지켜지지 않는 법은 사문화(死文化)된 법이다.

오늘은 국제연합일, 유엔데이(UN Day)다. 필자는 해마다 유엔의 날이 돌아오면 ‘유엔 석금(昔今)’, ‘유엔과 우리의 현주소’ 등등의 단상(斷想)에 젖곤 한다.

이는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당시 제46차 유엔 총회 취재 차 뉴욕 유엔본부를 다녀온 이후 습관처럼 돼 있다. 이듬해인 1992년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유엔 가입 1주년 기념 연설’이 있어 또다시 뉴욕에 특파되기도 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남북한이 유엔에 나란히 가입한 지도 3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우리의 유엔 가입 목적과 바람대로 역사는 흐르지 않고 있다. 우리의 유엔 첫 가입 당시 ‘평화로운 하나의 세계공동체를 향하여’라는 제하에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이 행한 연설문 중 일부를 인용해 본다. "대한민국이 유엔에 들어오기까지는 우리가 처음 가입을 신청했던 때로부터 42년 8개월이 걸렸습니다. … 이번 총회에서 대한민국과 함께 우리의 형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 남북한이 각각 다른 의석으로 유엔에 가입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며, 불완전한 것입니다. 우리 유엔대표단의 자리가 옵서버석에서 회원석으로 불과 수십 미터 옮겨오는 데 40년 넘어 걸렸고, 동·서독의 두 의석이 하나로 합쳐지는 데는 17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두 의석이 하나로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수차례에 걸쳐 박수갈채를 받았던 역사적 명연설이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되돌아보니 유엔헌장처럼 한갓 잘 다듬어진 미문에 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소회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엔 가입 후 역대 대통령들도 하나같이 유엔총회 기간을 맞아 연설을 했다. 지난달 열린 제77차 UN 총회에서 ‘자유와 연대;전환기 해법의 모색’이란 기조연설을 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 누차에 걸쳐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강조했다. 하지만 연설문 어디에도 한반도 평화와 북한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유엔이 추구하는 국제평화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국제정치 상황이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포성이 멈추지 않고 있다. 주지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시각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영토분쟁으로 치열한 전투가 지속되고 있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상대로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NATO)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나서면서 세계대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러시아는 전선의 상황이 불리해지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할지 모른다는 외신도 전해지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시진핑이 3연임 대관식을 갖고 장기 집권을 가시화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시진핑을 칭하기를 ‘인민영수’, ‘위대한 영수’ 등 극존칭을 써 가며 그 옛날 황제 반열에까지 추대하고 있다. 이러한 절대 권력을 확보한 시진핑은 타이완 통일을 위해서는 무력 사용도 포기하지 않겠다며 "조국 완전 통일을 반드시 실현할 것"이라고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 미국이 아니다. 미·중 간 패권 대결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북한은 전투기 150대를 동시 출격시켜 한반도를 긴장시키는 등 무력도발을 감행하려 하고 있다. 9·19 군사합의는 사실상 파괴된 상태로 남북은 또다시 군사상 대치 국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한반도는 지금 말 그대로 일촉즉발, 긴장의 연속이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 모두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 유엔헌장에 따라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에 일차적 책임을 지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다. 미·중·러 안보리 3국, 패권국(覇權國)들은 존 F. 케네디의 "인류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낼 것이다"라는 경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엔의 날을 맞아 잠시 ‘유엔 유감(遺憾)’ 상념에 잠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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