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전)인천행정동우회기획정책분과위원장
최계철 (전)인천행정동우회기획정책분과위원장

일찍이 중광의 깊이를 알아본 랑커스터 교수님이나 구상 시인님, 장욱진 화백님처럼 그를 제대로 알아본 명사들이 한결같이 인정한 점은 파격이다. 중광은 들여다볼수록 참으로 무애(無碍)한 자유인이었으며, 천진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예술인이었다.

중광은 그동안 우리가 공부했던 지식을 가벼이 뛰어넘었다. 모두 당연하다시피 잃어버린 원시적인 심성을 현대적 방법으로 소환했다. 예술가의 원죄인 모순적 양면을 숨기지 않고 천성적인 간결함으로 그려 냈다. 그 바탕에는 구도자인 견성(見性)의 체험이 선연히 녹아 있다.

중광의 그림에서 나약함이나 감미로운 낭만은 보이지 않는다. 난(蘭)조차도 야생의 바위벽에 붙어 거칠게 꽃을 피웠다. 달마 또한 정좌 수도하는 예전의 달마가 아니다. 기존의 그림자까지 성긴 붓질로 지워 내고 새로 창조한 중광에 의한 중광만의 살아있는 달마다. 동자(童子)나 동물은 다분히 해학적이나 결코 천하지 않다.

중광의 예술은 과감과 감필(減筆)이다. 게다가 무심필(無心筆)이다. 그의 필행(筆行)은 저 신라의 대안(大安)대사나 원효에 이르고, 술을 마셔야 그림을 그렸던 김명국이나 오원(吾園)에 닿는다. 

한국의 피카소라는 명성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계획된 의도로 데생(dessin)을 먼저 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라는 대로 그렸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그린 그림이 있고 왼손이나 획을 거꾸로 쓴 글씨가 있는가 하면 성기에 붓을 달고 그린 것도 있다.  

글은 또 어떤가. 명망 있는 「현대시학」에서 추천도 아닌 추대 작가로 선을 보였다. 역시 유수한 미술지에서도 특집으로 다뤘다. 누구에게 정식으로 사사한 일이 없이 면벽득도, 단애의 수행(修行)에서 혼자 성취한 선시(禪詩)이며 선화(禪畵)였기 때문이다.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이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나무라지 않았다. 일부러 허리를 낮춰 미친 중이며 파계승이며 엉터리 화가라는 세간의 비난을 웃어넘겼다.

중광 스님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치탈도첩은 오히려 자재(自在)의 예술세계를 완성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거지 행색에 더 천할 게 없었으니 공주집이든 술집이든, 고관대작이든, 닭이든, 말이든 만남과 교류에 거리낌이 없었다. 불성(佛性)에 있어서는 모두 차이가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성실히 수행한 것이다.

중광의 그림은 편하다. 대담하고 호쾌한 힘을 느낀다. 고추가 드러난 아이의 그림에서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유치(幼稚)와 더불어 나를 감싸는 무거운 짐들을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중광의 예술은 치(稚)이다. 

그 반대는 노(老)이다. 중광 말고 이미 장성한 그 누구의 그림에서 이렇게 근심이나 두려움 없이 통통 튀는 치(稚)를 발견할 수 있을까?

중광 스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다. 님이 고요 속으로 떠나던 날은 바람이 그렇게 불었다고 한다. 승계(僧界)와 속계(俗界)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으니 정녕 바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생전에 그 누구보다 고독해 무공적(無孔笛)을 불며 붓과 자적(自適)으로 이 세상의 오예(汚穢)를 훔쳤듯이 지금은 바람이 돼 저 세상의 오예까지 훔치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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