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KG 패스원 교수
김준기 ㈜KG 패스원 교수

이 세상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예컨대 시간이 그렇고 공간이 그렇다. 그리고 이 연속적인 세상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구획되고 구분된다. 시공간의 경계는 중간 지점을 기점으로 나뉘어지지만 실제로 중간은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 낸 허구이자 허상에 불과하다.

중도는 보수적이지도 않고 진보적이지도 않은지 헷갈리며, 우익적이기도 하고 좌익적이기도 한지 의심스럽다. 또한 경제에 대해서는 반재벌적이고 친서민적이며, 안보에 대해서는 반북적이고 친미적이며 중도적인지도 혼란스럽다.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긍정하고, 경쟁과 복지를 모두 추구하며, 공정과 평등을 함께 지향하고 미국과 중국 간 균형  외교를 중시한다는 주장은 기만적이고 이중적이며. 그런 행태는 유권자에 대한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정상적인 보수 세력을 극우 세력으로, 합리적인 진보 세력을 극렬 좌익 세력으로 매도하면서 정상적인 양 세력을 극단적인 정치 집단이라고 혐오하고 배격하기도 하지만 진정성은 전혀 없다. 좌우를 아우르는 이념적인 중간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쪽으로 난 길을 동시에 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럽과 같은 다당제가 아닌 특정 지역에 볼모가 된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중도정치 실현은 요원하다. 중도우파나 중도좌파를 자처하는 것은 말장난이며, 좌우로부터 지지를 받거나 비난을 회피하거나 모면하려는 정략적 행태이고, 중도층 국민들을 기망하고 농락하는 기회주의적 처사에 불과하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전향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상대편 진영으로 넘어갔거나 친북성을 감추고 양심적인 진보인 양 처신하는 경우도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자칭 중도주의자들은 격렬한 대립을 배제하고 협치를 통한 통합 정치를 자신들의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우기도 하지만, 중용의 정신은 이러한 모호성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것이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중용은 적당한 타협을 경계하며 애매한 양보를 거부한다. 

향원은 공자가 멀리하고 기피했던 인간형이었다. 

향원은 주변의 신망을 얻기위해 여론에 영합하는 인간이지만 겉으로는 선량하고 인간적이며 점잖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예의 바르고 얌전하며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평가받는 이런 유형의 인간에 대해 공자가 거리를 두고자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향원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로 견자(견者)와 광자(狂者) 모두를 도외시한다. 

견자는 도덕적이고 청렴하고 치밀하지만 소심하고 고지식하며, 광자는 대범하고 강한 결단력과 거센 도전성을 지니지만 다소 과장적이고 언행에 모순을 드러내는 인물형이다. 그런데 향원은 이러한 견자와 광자가 보이는 약점을 숨기고 진중하고 합리적인 인간처럼 행세한다. 공자는 이런 향원을 중용을 가장한 사이비 군자로 규정하고 이중적인 중도주의자보다 차라리 한계가 있을지언정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견자와 광자를 더 긍정하고 신뢰했다. 이들은 각각 극복해야 해야 할 허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비하게 절충을 기획하고 교활하게 협상을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도는 유무나 고락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로, 이는 종교적인 일이지 정치적인 일은 아니다. 즉, 중도는 수행으로 가능하며 정치적인 획책으로 실현될 수 없는 행법(行法)이 아니다. 중도정치란 결국 자신을 꾸며 권력에 기생하며 세상을 속이는 가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종북 이념을 제외하고 이념적 갈등으로 발생하는 정치적 불신이나 피로감은 탈이념과는 별개의 문제다. 어차피 정치가 대립을 조율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이념적 충돌은 오히려 정상적이고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 대립은 실체가 모호하고 정체가 불투명한 중도정치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해결할 수도 없다.

내 집 문 앞을 지나가면서 내게 들려가지 않아도 전혀 유감스럽지 않을 자는 오직 향원이라고 일갈한 공자의 말이 무색하게 돌아오는 총선에도 또 이런 이념의 회색지대에서 권력 획득 기회를 은밀하게 엿보는 향원들이 등장할 것이다. 꼭 막아야 할 군상들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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