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누구나 ‘자유’를 원하지만, 과연 자유를 제대로 구가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안타깝게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이제까지 제대로 배운 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장자, 도를 말하다」(오쇼 라즈니쉬)에 장자의 일화가 나옵니다.

강에서 낚시하던 장자에게 초나라 사신들이 오더니 "왕께서 당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든 채 잠시 강물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습니다.

"초나라에 신령한 거북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소. 그 거북이는 죽은 지 3천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원의 제단에 모셔져 있다고 하죠.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거북이는 죽어서 뼈만 남아 3천 년 동안 향을 맡으며 왕의 제사를 받고 싶어 하겠소? 아니면 진흙 바닥에 꼬리를 질질 끌면서 돌아다닐지라도 평범한 거북이로 살아있기를 원하겠소?"

이 질문에 사신들이 "그야 물론 거북이로서는 살아서 진흙 바닥에 꼬리를 끌며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지요"라고 답하자, 장자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오. 나 또한 진흙 바닥을 자유롭게 기어다니고 싶으니!"

온 백성의 시선과 경쟁자들의 음모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하는 ‘재상’이라는 자리, 반면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자유인’, 장자는 후자를 기꺼이 선택했습니다. 온갖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까지 쥘 수 있었지만, 장자는 그것들보다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자처럼 쉽게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자유’를 구가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자유로운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로는 자유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잘 모른다는 것이지요. 모르니까 당연히 즐길 수도 없을 겁니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면서 자전거 타기를 즐길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또는 어떻게 살아야 자유로운지를 모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솝우화에서 그 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개구리들이 논의 끝에 자신들에게도 큰 힘을 가진 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신은 커다란 통나무를 연못에 떨어뜨려 줬습니다. 통나무 왕이 오자 툭하면 다투고 서로를 비난하던 개구리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목소리가 작아지고 여전히 시끄럽긴 했지만 거친 다툼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통나무 왕을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요구에 아무런 말이나 반응이 없는 통나무 왕에게 점차 불만이 생겼고, 이윽고 신에게 다른 왕을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강한 왕, 무서운 왕을 요구한 것입니다. 신은 개구리들에게 몸집이 몹시 큰 학을 내려보냈습니다. 학 왕은 내려오자마자 눈에 보이는 개구리들을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개구리들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리석은 저 개구리들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통나무 왕이 이끄는 나라에서 살 때는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유가 오히려 불만과 불평의 대상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공포와 감시와 구속이 있는 어두운 세상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를 누릴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저 개구리들처럼 자발적인 노예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자신이 노예인지도 모른 채 공포 속에서 죽어갈 겁니다.

이 우화를 접하면서 에리히 프롬이 "사람들은 자유에서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한 말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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