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권번(券番)은 일제강점기 직업적인 기생을 길러 내던 교육기관이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고 활동하던 기생조합(妓生組合)의 일본식 명칭이다. 당시 기생의 직업은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제였기 때문에 모든 기생들은 권번에 기적을 둬야만 활동할 수 있었다. 권번은 유곽(遊廓)의 창기(娼妓)와 달리 예인(藝人)으로서 소리와 악기, 춤에 능한 명기(名妓)를 배출했던 곳으로 구분된다.

권번의 직접적인 뿌리는 조선의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지방 향기(鄕妓)와 서울 관기(官妓) 출신의 경기(京妓)들이 모여서 1909년 처음으로 만든 한성기생조합소(漢城妓生組合所)이다. 그리고 1913년 평양 출신 예기 중 남편이 없는 기생들(無夫妓)만 모아 만든 다동조합(茶洞組合), 이에 맞서 경기 출신 예기 중 남편을 둔 기생들(有夫妓)이 만든 광교조합(廣橋組合)에 두고 있다. 

1914년 즈음 조합에서 일본식 교방(敎坊)의 이름인 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한동안 조합과 권번이 혼용되면서 대체로 서울은 권번을, 지방은 여전히 조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한성기생조합소와 광교조합은 1918년 한성권번으로, 다동조합은 대정권번을 거쳐 1923년 조선권번으로 개칭됐다. 

인천에 권번이 언제 설립됐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1912년 매일신보에 ‘인천용동기생조합소(仁川龍洞妓生組合所)’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관기제도 폐지 이후에 ‘용동기생조합소’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다가 1914년 서울에서부터 조합의 이름이 권번으로 바뀌면서 인천도 혼용되다가 어느 시점에 ‘용동권번’으로 고착된 것으로 짐작된다.

1918년 조선연구회에서 출간한 전국 권번과 조합의 대표적 예기(藝妓)들을 소개한 「조선미인보감」에 ‘인천조합’이라는 명칭으로 소속 예기 5명이 보인다. 그들의 주소를 보면 인천부 용리 228, 용리 90, 용리 156 3곳으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주식회사가 아닌 조합 형태로 3곳이 운영돼 대외적으로는 ‘인천조합’으로 대표되고, 지역에서는 소재지를 강조한 ‘용동기생조합’으로 불리거나 혹은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예기조합’ 등으로 혼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11월 14일 시대일보에 용동권번을 2층 양옥의 광대한 건물로 신축해 3일간에 걸쳐 자축 겸 낙성연을 개최하는 기사가 있어 그 즈음에는 이미 ‘용동권번’으로 불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용동권번 돌계단의 축조는 이로부터 4년 뒤인 1929년 일인데, 그때가 용동 일대의 경기가 가장 은성(殷盛)하면서도 쇠퇴하는 시점이었다. 당시 인천의 지역경제와 용동권번 일대의 경기를 좌우하던 인천미두취인소가 1922년 10월부터 경성미두취인소와 통합하는 소위 ‘인취 문제’로 인해 근 10여 년간의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1931년 조선거래소령이 공포되고 경성주식현물거래소로 통합됐다. 따라서 경성거래소 기미부로의 전환은 인천 경제계에 상당한 타격이 됐다. 통합을 앞둔 시점인 1929년에 용동권번과 공생했던 일대 요리점, 상가 및 여관 등에서는 상권 활성화를 위한 자구책 마련에 부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방안의 일환으로 기금을 모아 돌계단을 축조하고 여러 광고 행사를 기획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상황은 한 해 앞인 1928년 8월 「별건곤」에 "米豆로 날이 밝아 米豆로 날이 점은다는 인천… 지금의 인천은 여관, 요리점, 기생집은 날마다 파리를 날닌다…"는 표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35년 인천부 용리 171에 ‘인화권번’, 1938년 인천부 용운정 90-4에 ‘인천권번’이 설립됐다. 1937년 당시 인화권번은 조선인 기생들이 적을 뒀고, 일본 내지(內地)인 기생들이 적을 둔 곳은 인천권번이라고 했다. 두 권번의 양립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인화권번이 인천권번으로 재조직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천의 권번은 용동기생조합에서 출발해 1920년대 용동권번 혹은 인천의 옛 이름을 딴 소성권번으로 혼용되다가 1930년대 중·후반 이후 인화권번, 그리고 인천권번으로 바뀌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권번은 1947년 공창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철폐됐다.

일제강점기 인천 경제의 성쇠와 함께했던 권번은 사라졌지만 배출된 여류 예인(藝人)들의 애환과 못다 한 이야기는 인천 역사 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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