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러 간다."

1963년 12월 21일, 당시 서독으로 먼저 일하러 떠나는 광부들의 소식을 실은 어느 신문사 헤드라인이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우리 광부 123명은 서독 ‘루르’ 탄광지대에서 석탄 노다지를 캐는 일을 하려고 이날 오전 10시 전세기에 몸을 실었다. 바로 1960~1970년대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독일에 파견한 ‘파독 근로자’ 역사의 시작이었다.

18일(현지시간) 오전 방문한 독일 에센 지역의 ‘파독광부기념회관 겸 한인문화회관’은 기자의 예상보다 작은 규모였다. 회관 바로 앞에는 커다란 닻이 하나 놓였는데, 물밑에 잠겨 흔들리는 배를 잡아 주는 닻과 같이 이곳 회관 역시 오랜 시간 어려움을 감내한 한인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장소로 존속하길 바란다는 글귀가 인상 깊었다.

회관은 우리나라 노동부가 관리하던 파독 광부들의 적립금으로 2009년 12월 마련한 공간이다. 현재는 독일에 계속 머무는 파독 간호사들을 아우르는 한인문화회관으로도 사용 중이다. 이에 따라 1960~197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당시 생활 사진, 신문 기사, 행사 기록, 직접 쓴 축시는 물론 재독 동포의 역사를 담은 다양한 자료를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파독 근로자들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경제성장과 발전의 바탕이 된 이들이다. 우리나라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1963년부터 1977년까지 광부 7천936명,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간호사 1만564명을 독일에 파견한 기록이 우리나라 공식 파독 역사다. 이들의 노동은 외화 획득은 물론 한국인의 성실함을 인정받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파독 광부들의 당시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파독 광부 모임은 ‘글뤽아우프회’라고 하는데, 글뤽아우프는 ‘행운을 빈다’는 뜻이다. 땅 밑으로 30분 이상을 헤쳐 들어가야 하는 만큼 광산이 워낙 위험해 서로의 안전을 빌어 주는 의미였다. 회관 한편에는 이들이 직접 사용한 광차와 인차, 그리고 삽을 전시했는데, 삽을 껴안고 운 날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장순휘 시인이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축시(우리들은 코리안 엔젤이었습니다)를 보면 파독 간호사들의 애환이 짐작된다. 여기에는 "낮에는 병동에서, 밤에는 독일어를 배워 가며 마르크화를 벌어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를 위해 보낼 때마다 우리들이 왜 이 자리에 있는가를 되새김하며 그리움을 이겨 냈습니다"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이 언제까지 기억될지는 의문이다. 내년이면 파독 60주년을 맞지만 이대로라면 70주년, 80주년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파독 근로자들은 대부분 고령이라 대외 활동이 차츰 힘들어지지만, 우리나라에서 파독 근로자들을 지원하고 이들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 알리는 움직임은 신통찮기 때문이다.

당장 파독 광부들의 적립금으로 마련한 회관도 그동안 회원들의 재능기부 형식으로 건물을 관리하거나 화장실을 수리했지만, 이제는 이들도 힘을 쓰기 어려운데다 관리에 필요한 재원 마련도 마땅치 않은 실정이다. 그래서인지 회원들의 안내로 돌아본 회관은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아 냉기가 돌고, 지하 화장실은 수리하다 만 상태였다.

회관 관장이기도 한 심동간 ㈔재독한인글뤽아우프 회장은 "현재 나이가 가장 어린 회원이 70대로, 운영위원회가 이곳을 관리하고 파독 역사를 알리는 활동에 힘쓰지만 녹록지 않다"며 "특정 시기마다 이곳을 찾아 인사하는 데 그치지 말고 관련 시행령 마련과 같은 실제 움직임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에센=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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