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면 없던 관심도 생기곤 한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처럼 말이다. 판도라는 항아리를 볼 때마다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제우스가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는 결국 항아리를 열어 버렸다. 그 속에는 죽음, 증오, 질투, 복수, 원한, 고통, 절망, 가난, 질병 등 인간에게 유해한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깜짝 놀란 판도라는 뒤늦게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번 쏟은 불행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때 미쳐 나오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우리의 인생이 비록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희망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미스트(2007)’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생존의 위협 속에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을 다룬 작품이다. 

전날 내린 폭우로 엉망이 된 미국의 작은 마을, 전기도 통신도 먹통이다. 밤새 내린 비의 기운이 남아서인지 마을 곳곳엔 안개가 깔렸다. 주인공 데이빗은 집 안 수리 용품과 식료품을 사러 아들과 함께 마트로 향한다. 도착한 슈퍼마켓은 손님들로 붐볐다. 그때 한 노인이 피를 흘리며 다급히 들어온다. 안개 속에 뭔가 있다고 주장하는 노인은 밖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갑자기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지진처럼 느껴지는 강한 충격파에 사람들은 일순간 공포를 느낀다. 게다가 건물 밖은 짙은 안개로 시계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 돼 버렸다.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몇몇 사람들은 주차장으로 향했고, 이내 들리는 비명소리가 그들의 상태를 알려 줄 뿐이었다. 그렇게 데이빗과 어린 아들은 마트에 고립된다. 

안개 속에 몸을 감춘 괴생명체를 확인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사느냐, 죽느냐의 위기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된다. 순식간에 마트 안은 작은 사회가 돼 계층 간, 지역 간, 인종 간 갈등 양상을 보이며 분열된다. 닫힌 공간에서 발생한 출구 없는 혼란과 목숨을 담보로 한 극단적인 공포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댈 곳을 찾게 했고, 그 결과 종교의 탈을 쓴 광기가 등장했다. 카모디 부인은 시종일관 종말론을 부르짖으며, "죄 많은 인간을 단죄하러 온 주님의 심판"에 따라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선동하곤 했다.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그 말은 점점 커져 가는 공포심과 절박함을 양분 삼아 세력을 확장했다. 그 결과 카모디 부인은 신의 대리인으로 추앙 받았고, 제물의 필요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광신도들은 지목된 사람을 죄인 취급하며 그 희생을 정당화했다. 이렇듯 사투를 벌일 대상은 외부만이 아닌 내부에도 자리잡고 있었다. 

결국 데이빗을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은 종말론의 광기와 괴생명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삶의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름이 떨어져 차량이 멈추자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괴수의 포효도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생생했다. 공포에 질려 자포자기한 사람들. 그리고 데이빗 손에 쥔 총 한 자루,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미스트’는 괴생명체와의 사투라는 표면적인 이야기 아래 이성이 마비된 틈을 비집고 나타나는 사이비 종교의 광기성을 섬뜩하게 그린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격적인 반전 결말에 있다. 진짜 절망적인 상황은 희망을 놓아 버리는 순간 찾아오는 것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순간 일말의 구원의 여지조차 사라지는 것임을 엔딩을 통해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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