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빈곤 포르노’라는 단어가 정치권에서 ‘각광’ 받는다.

‘포르노’라는 단어를 들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가 성행위를 하는 부끄럽고 숨겨야 할 듯싶은 모습이 떠오른다. 한데,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영상 속 주인공이 억지로 카메라 앞에 선 ‘나’라고 생각하면 그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이런 엄청난 단어에 빈곤을 덧붙여 ‘빈곤 포르노’라는 합성어가 탄생했다. 어려움에 처한 자들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 줘 이를 보고 듣고 읽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해 모금을 유도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말한다. 이 개념은 1980년대 아프리카 어린아이의 힘든 생존 영상을 보여 줘 수억 달러에 이르는 금액을 모금하자 급속히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부터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이 먹지 못해 뼈와 가죽만 남은 모습, 동물 배설물이 섞인 물을 마시는 장면 따위를 보여 주면서 국제기구에 기부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이 케이블 방송에 자주 등장한다.

이 광고를 보고 기자의 장인도 몇 차례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극을 주는 장면이 군중의 마음을 흔들어 도움의 손길을 얻는 데 큰 공헌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영상 속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고, 그 장면이 전 세계인들에게 노출된다고 생각하면 도움의 손길과 부끄러움 사이에서 여러 생각이 스칠 테다.

기자가 초등학교 3~4학년 시절, 교실에서는 잘사는 학생들이 돈을 모아 가난한 급우에게 학용품을 전달하는 일이 유행했다. ‘저 친구는 행색을 보니 가난하겠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학용품 수급 대상자를 가난하다고 낙인찍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용품 받는 대상자를 호명하는데 기자의 이름이 들렸다. 머리는 멍해지고 얼굴은 화끈거려 어떻게 나가서 받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며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아이들과 기자의 가난에 대한 수치심은 비교가 되지 않지만 당사자 배려 없는 도움은 받는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가 오드리 햅번과 같은 자세를 취했건, 연출 조작을 했건, 잘잘못을 따지는 자체가 시간 낭비다.

빈곤 포르노라는 단어가 널리 알려진 마당에 연말연시 정부기관, 국회, 지방자치단체, 기업체 같은 소위 힘 있고 가진 자들이 복지기관에 좋은 일을 하게 되면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바란다.

도움 받는 이들의 인권과 사생활을 보호하고 존중했으면 한다. 막무가내로 아프고 가난한 이들을 배경으로 사진 찍어 온라인에 퍼뜨리지 않았으면 한다. 순수한 도움이 받는 이들에게 더 따뜻한 정을 전달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