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산과 한강을 낀 인구 32만4천 명의 하남시는 급성장하는 수도권 대표 신도시다. 선사시대부터 신라·백제·고구려는 물론, 근대문화의 유적지가 풍부해 볼거리가 많다.

 그래서 하남시를 ‘숨겨진 보물도시’라고도 한다. 역사와 문화의 숨결이 잔잔하게 흐르는 하남에는 초기 천주교 박해의 흔적을 간직한 순례 성지가 있다. 바로 구산성지다. 또 이곳에서 450m가량 이동하면 한국 천주교 역사를 보여주는 근대 건축물인 구산성당이 나온다.

구산성지 입구
구산성지 입구

# 천주교 역사 품은 순례 성지

지금은 미사강변도시(미사신도시)로 더 유명한 하남시 망월동에는 산 모양이 거북이를 닮은 낮은 산과 그 앞에 자리한 ‘구산(龜山)마을’이 있었다.

하남 미사강변도시는 2009년 개발을 시작한 보금자리주택 조성사업이다. 농촌마을의 전형이었던 이 지역 대부분의 풍광이 달라졌고 구산마을 사람들은 흩어졌지만, 거북을 닮은 산과 구산성당(龜山聖堂), 그리고 구산성지(龜山聖地)는 여전히 이 지역을 말없이 지킨다.

하남 구산성지는 망월동 387의 12 일원에 자리한다. 2001년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됐다. 원래 ‘성지(聖地)’는 종교의 발상지를 말하지만, 종교 유적이 남은 곳으로 의미를 확장했다. 가톨릭에서도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복음을 전파하고 부활했던 팔레스티나 지방을 가리키던 용어였지만, 차츰 예수의 제자, 순교자, 성인들과 관련한 곳까지 가리키는 용어로 확장했다고 한다.

# 초창기 한국 천주교 신앙 태동지

하남시가 자리한 경기 동부지역에는 구산성지를 비롯해 광주 천진암성지와 남한산성성지, 양평 양근성지, 남양주 마재성지를 비롯해 많은 가톨릭 성지가 자리한다.

동남부까지 확대하면 안성 죽산성지, 이천 단내성지까지도 이어진다. 일명 ‘여리양광(여주·이천·양근·광주)’이라고 하는 초창기 한국 천주교 신앙의 발아처가 된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남인 실학자이자 서학과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정약용과 그 형제들이 옛 광주 마재리(현 남양주시 능내리) 지역 출신이다. 

우리나라 천주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17세기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조선에 전해진 뒤 1784년 이승훈(李承薰), 이벽(李檗)이 종교신앙을 시작했고, 1800년에는 20여년 만에 약 1만여 명의 신자들로 그 세력을 확대했단다.

정조 치세인 1791년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해박해가 일어났고, 정조 사후에도 신유박해·기해박해·병오박해·병인박해를 비롯한 연이은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다.

구산성지 성당.
구산성지 성당.

# 조선 천주교 전파

조선의 천주교 전파는 잘 알려진 대로 학문의 형태로 이뤄졌고, 식자층이었던 양반 계층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신유박해를 기회로 신자 중 양반층은 다수 이탈하고, 남은 세력은 중인이나 상민 같은 평민층과 부녀자들이었다고 한다.

이후 천주교 신자들은 교우촌을 형성해 살기 시작했는데, 하남 구산마을도 그러한 교우촌의 하나였다. 하지만 일반 교우촌이 산골짜기 같이 정부권력이 닿기 어려운 곳에 자리잡았던 상황과 달리 구산마을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강변에 자리잡은 농촌마을이었다.

# 구산성지는 김성우 성인 묫자리

구산성지는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인 김성우 안토니오의 묫자리이자 진묘가 있는 곳으로, 성지로서 위상을 온전하게 갖췄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1830년대 초반 천주교에 입교했고, 1834년 유방제 신부한테 세례를 받았다. 구산마을 출신이지만 종교상 이유로 서울로 이주해 생활하다가 기해박해(1839년) 전에는 아마도 박해를 피해 구산마을로 다시 돌아왔다고 보인다.

하지만 결국 박해를 피하지 못하고 체포됐고, 기록에 따르면 공식 재판도 없이 혹독한 심문을 받고 감옥에서 교살됐다고 알려졌다.

구산의 김 씨 문중에서 김성우를 비롯해 다음 세대에 걸쳐 모두 7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1925년 시복됐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됐다.

성모상.
성모상.

▶구산성지 성모상

구산성지는 경주 김 씨네 ‘큰 산소깟’ 이었던 망월리 387(현재 망월동 387 일원)에 조성했다. 1977년에는 이곳에 김성우 안토니오의 순교비를 건립하고, 1978년에 순교자 최지현의 묘를 조성했다. 이후 2014년에 순교자 김문집·김만집·김성희·김차희·김경희·김윤희·심칠여를 포함해 다른 순교자의 묘도 모두 구산성지에 모이게 됐다.

구산성지를 본격 조성하는 과정은 여러 가지 법적 제한으로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성지 조성이 끝나기 전, 지금도 구산성지 입구에 우뚝 선 성모상을 먼저 세웠다. 구산성당 초대 주임을 지냈던 고 길홍균(이냐시오) 신부가 꿈속에서 만난 성모의 모습을 재현했다고 한다.

성모상은 1983년 고 김세중 화백에게 의뢰해 제작했다. 김세중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우리나라 제1세대 조각가 중 한 명이다. 성모상은 왕관을 쓰고 왕홀(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들고 다니는 지팡이나 막대)을 들었는데, 이런 형태의 성모상은 흔하지 않다고 한다.

구산성당.
구산성당.

# 한국 천주교 역사 구산성당

하남 구산성당은 구산성지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로 약 45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건축총면적은 131.1㎡에 높이는 6.8m다. 고딕건축양식을 모델로 지은 시멘트 몰탈 구조의 작은 성당이다. 주출입구 중앙에 종탑이 있으며, 지붕은 목재 트러스로 구성했다.

구산성지에서 새롭게 조성한 주택단지 골목 사이로 15분가량 걷거나, 정비된 망월천을 따라 걸어도 20여 분 안팎이면 구산성당까지 다다른다. 여전히 남은 구산과 더불어 주변은 넓은 공원으로 조성했다.

# 신자들이 직접 지은 구산성당

구산성당 건축물은 1956년 신자들이 직접 지었다. 1836년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생가에서 시작한 구산 공소가 구산성당의 시초라고 할 만한데, 구산마을 가톨릭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구산 공소에는 김대건·최양업·최방제 세 소년을 마카오 신학교에 보내 오늘날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만든 한국 최초 서양인 신부인 모방(Maubant) 신부가 은거했다고 추정된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경기도 지역을 순방하던 당시 구산마을과 구산공소를 방문했다는 구전이 내려오기도 한다. 박해뿐만 아니라 6·25전쟁 속에서도 당시 신부와 신학생을 지켜낸 곳이다.

# 경기도 등록문화재 등록

이 작고 조용한 성당에 지난 9월 30일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경기도 등록문화재 신규 등록 예고가 공고됐다. 구산성당을 문화재로 등록해 보존할 가치가 있음을 정부가 인정했다는 뜻이다.

구산성당은 내년에 경기도문화재위원회 확정 심의에서 가결하면 경기도등록문화재로 등록한다. 등록문화재 등록제도는 지금까지의 문화재 지정제도를 보완하고 보존 위기에 처한 근현대 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도입한 제도로, 시·도 등록문화재는 최근(2021년) 신설했다.

지금은 그 존재가 지극히 당연하게 보이지만 사실 구산성당의 보존은 미사강변도시 개발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슈를 낳았다.

개발주체는 ‘택지개발촉진법’을 근거로 구산성당의 철거가 당연하다고 판단했지만 성당 신자들과 학계가 노력해 이전·보존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천주교회, 신자, 시민의 기부와 기업의 참여로 원형 그대로 이축해 보존하게 됐다.

구산성지 묘역.
구산성지 묘역.

# 레일로 이동해 보존

조적조(돌·벽돌·콘크리트블록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드는 건축구조) 건물의 이축 보존은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했고, 그 자체로도 건축 보존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당은 레일을 건물 아래에 설치해 건물을 해체하지 않고 약 150m 이동해 현재 자리로 이전·보존했다. 약 한 달 동안 날마다 조금씩 성당을 옮겨 그대로 지켜온 과정이 마치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를 보여주는 듯싶다.

지금은 지역이 갖던 옛 정취가 많이 사라졌지만, 구산과 구산성당, 그리고 구산성지는 조선후기 박해시대에도 신실하게 신앙을 간직하던 농촌마을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간직한 소중한 역사문화유산이다.

  하남=이홍재 기자 hjl@kihoilbo.co.kr

사진= <하남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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