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영화 ‘탄생’은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영화로 세례를 받은 날부터 젊은 나이에 순교하기까지 10년간의 삶을 조명한다. 천주교 박해가 날로 심해지던 1844년, 청년 김대건 부제(사제 후보자)는 마카오에서 필리핀으로, 상하이에서 만주로 이동하며 혈혈단신으로 조선 입국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조선의 첫 사제로 신앙의 구심점이 되고자 한 젊은이의 고단하지만 거룩한 여정은 그러나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로 마무리된다. 비록 신부님의 생은 짧았지만 청년 김대건이 신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인내와 용기, 헌신은 종교를 넘어서는 숭고함을 준다. 

다만, 영화 ‘탄생’은 10여 년의 성장사가 방점 없이 고루 나열되면서 깊이감이 얕아진 측면이 있다. 더욱이 종교를 향한 믿음으로 배교하지 않고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수많은 천주교인의 모습은 숱한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이어가는 기적의 불씨가 됐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고뇌의 시간이 축소된 점은 보는 이를 번뇌하게 했다. "만일 내가 저 당시 신도 혹은 사제였다면 배교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이 질문을 영화 ‘사일런스(침묵)’가 깊이 다룬다. 

16세기 일본에 첫발을 디딘 천주교는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에 큰 탄압을 받는다. 일본 천주교의 부흥을 이끈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를 했다는 서신이 포르투갈에 전해지고, 이를 믿지 못하는 제자 가루페와 로드리게스 신부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상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어부 출신 일본인 기치지로의 안내로 일본 규슈 지방의 토모기 마을에 도착한 두 신부는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하는 마을 촌장과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체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서양 신부가 잠입했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악명 높은 나가사키의 고관 이노우에는 "사흘 안에 신부를 내놓지 않으면 촌장을 포함한 4명을 잡아가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신부를 내놓지 않자 4명의 인질 중 배교한 한 명을 제외한 세 사람은 끔찍한 고문 끝에 살해된다. 이 모습을 숨어서 지켜본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무력함과 침묵하는 주님께 절망한다. 흩어져 선교하기로 한 두 신부 중 로드리게스 신부는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던 중 물속에 비친 예수의 얼굴을 마주한다. 기쁨도 잠시, 배교자의 밀고로 그는 감옥에 갇힌다. 

신부의 순교보다 배교가 신앙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최선이라 판단한 관리는 신부의 배교를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데, 그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신도들의 죽음을 목도하게 하는 것이었다. 천천히 잔인하게 고문해 생명을 앗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로드리게스 신부는 결국 예수 상을 밟는 배교를 선택한다. 그때 신부는 침묵을 깬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괜찮다. 너의 고통을 알고 있다. 기꺼이 밟아라." 

고문 받던 신자들은 신부의 배교로 살아났지만, 로드리게스 신부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일본 정부의 감시 아래서 40년을 더 살다 간 로드리게스는 불교식 장례로 생을 마감하지만 그 두 손에는 작은 십자가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 ‘사일런스’에서 로드리게스 신부의 행동이 배신인지 아닌지는 관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그가 신자를 사랑과 연민으로 바라봤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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