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휘 정치학박사
장순휘 정치학박사

‘인천상륙작전’은 지난 73년간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 ‘표기’다.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면 매우 부적절한 표현이며, 매우 부적합한 용어다. 인천상륙작전의 사전적 정의는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유엔군과 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전개했던 군사작전이다. 이 작전으로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6·25전쟁의 전세(戰勢)가 바뀌었다"고 명시됐다. 여기에서 ‘전세가 바뀌었다’는 표현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낙동강전선에서 수세(守勢)에 몰렸던 국군과 유엔군을 어느 날 상륙작전 한 방으로 공세(攻勢)로 전환된 점에서 평범한 작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은 ‘평가절하’됐다고 볼 수 있다.

 전쟁(War)에서 작전(Operations)은 무엇인가? 합동군사대학교가 발행(2013년)한 미 국방부 군사용어사전(DOD DM&AT)에는 ‘전략적 군사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만든 일련의 기동과 어떤 기동’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작전의 규모에 따라서는 대규모 작전과 소규모 작전으로 구분할 수 있고, 작전 결과에 따라서는 승리한 작전과 실패한 작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승리한 작전의 성과에 따라서 ‘대첩(大捷)’이라고 명명하는데, ‘대첩’은 전쟁 중 전투에서 아군이 적군을 크게 이긴 전승을 지칭한다. ‘대첩’은 전쟁 국면의 전환과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 결정적 전투의 승리를 말하기 때문에 전문가들도 매우 신중한 분석과 평가를 한다.

 1950년 6·25전쟁 당시 3대 대첩(大捷)으로 춘천대첩(1950년 6월 25~30일), 다부동대첩(1950년 8월 20~27일), 인천상륙대첩(1950년 9월 15~28일)을 공식적으로 지명하는 것은 매우 유의미하다. 우선 북한군의 기습으로 개전 초 38도선의 국군이 패배를 거듭하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춘천방면의 국군 제6사단(김종오 대령)이 인민군 제2군단의 대포위전략을 막아낸 5일의 대승(大勝)이었다. 그리고 연전연패의 지연전으로 낙동강전선까지 몰렸을 때 다부동 방면의 국군 제1사단(백선엽 준장) 앞으로 북한군 3개 사단(제3·13·15사단)이 집중 돌파해 대구와 부산으로 진출하려는 공세를 좌절시켜서 대반격의 전기를 잡았던 대승이었다. 

 인천상륙작전(Incheon Landing Operations)은 전쟁 초기에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던, 세계 전사에 빛나는 성공적인 상륙대첩(上陸大捷)이었다. 특히 ‘인천상륙대첩(仁川上陸大捷)’은 북한군을 대혼란에 빠뜨리고 9·28 수도서울 탈환의 발판을 제공한 대승이었으며, 전장의 주도권(the initiative)을 장악하면서 국가 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후 북진(北進) 반격을 가능케 한 최고 수준의 한·미·유엔군 연합작전이었다. 북한군의 허를 찌르면서 보급로를 차단하는 맥아더의 신출귀몰한 작전술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맥아더 장군은 미 합참의 반대를 극복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인천이라는 군사적 지형은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6.9m이고, 만조 시에는 수심이 10m였다. 간조 시에는 폭 2~6㎞의 개펄이 드러나며, 최소 수심 7m를 필요로 하는 상륙주정과 최소 수심 8.8m를 필요로 하는 상륙함(LST)을 사용할 경우에는 상륙작업 가능 시간이 만조 시 3시간 정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가진 곳이 인천앞바다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인천항은 부두 높이가 5~6m의 해안벽지형으로 보병이 극복하기 어렵고, 간조 시 6㎞의 진흙뻘은 상륙 직후 가장 취약한 상태로 적의 저항이 강할 경우에 전멸가능성이 우려되는 지형적 특징을 갖고 있기에 정상적인 군지휘관이라면 절대적으로 기피해야 하는 지형이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8월 23일 미 합참대표단과 회의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한다. "인천상륙작전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여러분의 그 주장이 나에게는 바로 기습의 요인이 된다. 왜냐면 적 지휘관 역시 누구도 그러한 시도를 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며 "인천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10만 명의 희생을 덜어줄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미 합참의 주장을 극복했다. 

 사실상 맥아더 장군의 주장은 그의 말대로 무모했으나 그래서 세계 전사에 빛나는 위대한 대승(大勝), 즉 대첩(大捷)으로 재평가되고 재명명(再命名)되는 것이 맞다. 특히 맥아더 장군의 배려로 한국군 2개 연대(해병대, 제17연대)가 참가해 한미연합작전으로 시행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제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축소지향적 명칭을 깨고 ‘인천상륙대첩’이라는 군사전술적 명명으로 인천시민들이 사랑해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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