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지난해 12월 28일 0시부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두 번째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횡령·뇌물 등의 혐의로 징역 17년형과 130억 원의 벌금형을 받고 수감됐다가 건강상 이유로 형 집행이 정지됐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박근혜 정부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다수의 인물도 사면·복권 대상에 포함됐다. 

 그런데 이 사면을 두고 "사법부의 판단을 형해화하는 사면권 남용은 삼권분립 위반이고 민주주의 훼손"이라는 비판을 법률전문가들과 일반시민들이 제기한다. "다 풀어줄 바에야 재판은 뭐하러 하나"라는 사법 허무주의와 냉소도 팽배하다.  

 우리 헌법 제75조 제1항은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면·감형 또는 복권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 규정을 근거로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은 "헌법상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대통령의 사면권은 그 어느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대통령의 ‘자유재량권’인 것처럼 호도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각종 권한(중요정책 국민투표회부권(제72조), 외교권(제73조), 국군통수권(제74조), 대통령령발령권(제75조), 긴급명령권(제76조), 계엄선포권(제77조), 공무원임면권(제78조) 등) 중 실상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 아닌 것이 있는가? 헌법 어디에도 ‘고유 권한’이라는 법문이 쓰여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이 유독 ‘사면권’에 대해서만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반복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그 속내가 의심스럽다. 어쩌면 국민들의 머릿속에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는 신성불가침 영역과 같아서 그 타당성 여부에 대해 국민들은 판단하거나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세뇌하려는 저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요컨대 사면권의 역사가 군왕(君王)의 은전과 시혜로부터 시원(始源)된 것은 맞지만, 국민주권론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의 헌법체제 하에서는 사면권이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는 ‘완전 자유재량의 고유 권한’이 아니다.

 우리 헌정 사상 대통령의 사면권은 헌법정신과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도구로 자주 오·남용돼 왔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말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논의해 이들에 대한 사면을 단행했는데, 이것이 ‘국민 통합’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 분열’의 단초가 됐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22년 3·9 대선에 앞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했었는데 이 또한 큰 문제점이 있다.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정농단의 책임을 물어 전원일치로 탄핵 결정을 했고, 대법원은 관련 범죄에 대해 22년 징역형의 확정판결을 내렸었는데, ‘촛불정부’를 자칭했던 당시 문 대통령이 고뇌에 찬 사법적 노력과 결과들을 깡그리 물거품으로 되돌린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민의를 거슬러 가치전도의 세상에 이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들을 감안해 보면, 2021년 새해 첫날 신년 인터뷰에서 "적절한 시기에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 국민 통합을 위한 큰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가 여론의 빗발치는 비판을 받아 인기가 곤두박질쳐서 결국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이낙연 전 대표가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서 "난 매우 불운했고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앞장서서 용감하게(?) ‘사면 깃발’을 들었다가 결과적으로 대선후보에 선출되지 못했었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 이명박·박근혜 두 전 대통령들은 모두 사면된 현실을 맞지 않았는가. 

 헌법가치 존중과 법치주의를 온전히 실천해야 할 대통령들,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닌 ‘법대 출신 대통령들’에 의해 사면권 행사가 국민의 법감정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행사됐다는 점이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부디 위정자들은 법치국가 원리인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법대로 지배(법에 의한 자의적 지배, rule by law)’와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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