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초빙교수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초빙교수

사람에게 외로움은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가 작을 때도 있지만 유난히 커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도를 닦아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따라오지 않게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타자에게 격리될 때 나타나는 고립감, 군중 속에서도 느끼는 고독감도 넓은 의미의 외로움에 포함시키고 싶다. 

외로움은 남들에게 고립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낳는다. 타자의 눈빛에 예민한 사람일수록 외로움을 더 많이 탄다.

타인의 평가에 눈감고 돈키호테처럼 살 수도 있지만 바람직한 인간상은 아니다.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에서 만나지 못하자 온라인에서 타자와 관계를 유지할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진화돼 온 인간이 고립될 때 다양한 질병에 걸릴 확률과 조기 사망 위험이 높아진다는 보고도 있다.

「고립의 시대(The lonely century)」의 저자 노리나 허츠에 따르면 외로움은 타자들이 자신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찾아온다고 한다.

외로움을 느끼는 사회적 환경은 포퓰리스트들이 악용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만이 ‘국민’을 위한다고 들먹이며, 제도와 규범을 존중하고 관용과 공정성을 가치로 삼는 사회에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 그래야 표를 얻기 때문이다.

허츠는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든다. 트럼프 대통령은 붉은 모자를 쓰고 "위대한 국민", "경이로운 국민"을 반복하며 "그동안 기억되지 않은 미국의 남녀를 내가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달콤한 수사(修辭)로 ‘월드 레슬링 엔터테인먼트’의 팬덤 분위기를 유도해 표를 얻어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독일 나치즘의 기원이 바로 이런 외로움 위에서 출발했다고 진단한다. 전체주의를 추종한 사람들은 주로 사회에서 고립되고, 배제되고, 사회에 내 자리가 없다고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고 분석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성격적 요인에 의해 자신이 만든 고치 안에 들어앉은 경우도 많다. 이것은 타자에 의해 내 성격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내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느끼지만,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내 뜻대로 사는 듯하지만 나에게 욕망을 투입한 사람(어머니)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이 의미와 유사하다. 

내 욕심이 크거나 이 세상의 관습과 맞지 않아 불행한 삶을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친 것도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일 테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욕망이다. 욕망이 끝나는 지점에서 죽음과 마주친다. 욕망의 크고 작음과 그 컬러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욕망의 분출구와 같다.

개인의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해 능력만큼 살아보라는 사회 시스템이 신자유주의라면 권력과 물질을 차지하려는 능력과 의지가 빈약하거나 없는 사람은 사회의 사각지대에 내몰려 주변화되고 타자화되기 쉽다.

이러한 상황에 일찍이 눈길을 보낸 사람이 카를 마르크스다. 누군가의 잉여 노동을 가져가는 자가 있기에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가 있으니, 노동자들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선언한 셈이다.

이 세상이 힘 있는 자들, 가진 자들의 리그로 벌어지는 축제여서는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사회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외로움이 밀려온다. 외로움은 인간의 자존감을 낮추고, 결혼해 자식을 낳아 기르려는 의욕마저 꺾어 버린다.

한나 아렌트는 외로운 사람을 "사회에 내 자리가 없는 사람들"로 규정했다. 그녀의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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