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3·1독립만세운동은 한민족 최대의 비폭력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일제의 부당한 조선 점령과 무단통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중국 길림성의 무오독립선언과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김규식(金奎植)의 독립 시위 주문, 고종의 독살설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 돼 발생했다. 특히 고종의 독살설을 전해 듣고 분개해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온 수십만 군중이 한양 한복판에서 시위를 벌였다.

3·1독립만세운동은 민족종교인 천도교를 비롯 기독교, 불교가 주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의 연합으로 만세 시위 계획과 장소가 결정됐다. 독립선언서 초안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했고,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교정을 보았으며,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원래 3·1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로 예정됐으나,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이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일명 申勝熙)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3월 1일로 앞당겼다. 2월 28일경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의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고, 민족대표가 모일 장소는 태화관으로 바뀌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했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이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山縣伊三郞)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자마자 60여 명의 일본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했다. 저녁 무렵에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한편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m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했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러자 탑골공원에 모인 1천여 명의 학생이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했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했다.

대한문에 도착한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계속 진행해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하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오후 6시 자진해산했다. 다음 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해 투옥했는데 그 숫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3·1독립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함경남도 북청, 평남 강서군 사천, 충남 천안시 병천, 충북 괴산군 괴산읍, 부산 동래, 전북 남원과 군산, 수원시 향남면 제암리 등 한반도 전역에서 거세게 벌어져 일제를 당혹케했다. 임종국(林鍾國)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60일 동안 전국에서 1천214회의 항일독립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한다.

3·1독립만세운동은 일본과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됐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3·1운동에 참가했고,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했으며, 1만2천 명이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3·1독립만세운동 이후 3개월간 만세운동 상황은 202만3천89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시위 횟수는 1천542회에 달한다. 무려 사망자가 7천509명, 부상자가 1만5천961명, 피체포자가 4만6천948명에 이르렀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 교였다.

3·1독립만세운동으로 독립은 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렸다. 그리고 중국 상해에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근대 국민 국가 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맺었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무단통치를 문화 통치로 바꾸어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됐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됐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반영운동, 베트남·필리핀·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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