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근대 이후 대다수 국가들은 ‘법치주의 국가’임을 표방한다. 그러나 각국이 운용하는 법치주의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각양각색임을 확인할 수 있다. 법치주의를 ‘실질적으로’ 잘 실천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법치주의를 ‘형식적으로만’ 운용하는 나라들도 있다(‘무늬만 법치주의’). 

요즘 우리나라는 ‘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법조인(특히 전·현직 검사)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다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학폭 논란’ 등 작금의 타락 사례들로 인해 법조인이 존경을 받기는커녕 비판과 야유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법조인이 국가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사회악·비리·부도덕의 근원이 됐다는 인식이 크게 확산됐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한국의 법치주의를 근본적으로 쇄신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나가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법치주의의 기본틀은 일제강점기에 도입됐다. 따라서 국가 운영의 많은 부문이 일본의 영향(제국주의와 식민통치)을 크게 받았고, 그 영향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됐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는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칠 만한 자격·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매우 드물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법대를 다닌 사람, 고위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관료직에 있었던 사람들이 일본 책을 번역한 내용으로 법학을 가르친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은 유신체제 등 권위주의정부 시대에 만들어진 법들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암기해 공부해야 했고, 극소수의 ‘독한(?) 수재들’이 비좁은 법조인 등용시험 관문을 거쳐 검사·판사로 임용되고 변호사로 진출했다. 

이들 중에는 ‘돈’도 ‘빽’도 없는 빈한한 집안 출신(요즘말로는 ‘흙수저 출신’)의 우수한 자제들이 많았다. 이들은 초기에는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법조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졌겠지만, 법조인이 된 이후에는 급속히 기득권층에 편입돼 사회 발전을 선도하기는커녕 가로막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법조인들은 자신들의 영화를 지켜내고 탐욕을 실현하기에 급급하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면하며 구태에 안주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으로 국민들 눈에 비쳐졌다(수사권·기소권 분리에 대한 저항 등).

우리의 법률문화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기 위해 개선해야 할 사항은 여러 가지겠지만, 여기에서는 국회가 적극 나서서 시급히 추진해야 할 점을 형사법 중심으로 우선 두 가지만 거론해 본다.

첫째, ‘배임죄’(형법 제355조 제2항)를 폐지해야 한다. 대부분 선진국은 ‘배임’을 형벌로 규율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많은 외국인 임원들은 오래전부터 "대한민국의 법제 중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배임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해 왔다. 그러면 선진국은 왜 ‘배임’을 형벌로 규율하지 않는 것일까? 

‘배임(背任)’의 본질이 수임인의 위임인에 대한 ‘신뢰 배반(배신)’이므로 당사자 간 민사사건(손해배상청구사건)으로 처리하면 족하고, 국가가 형벌권으로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간통죄 폐지’ 사유와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사적 부문에 대한 형벌권 개입은 부적절하므로 이를 금지 내지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배임죄는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라는 범죄의 구성 요건이 너무 추상적·포괄적이고 모호해서 위헌 소지가 크다는 점을 종래 다수 법학자들이 지적해 왔다(죄형법정주의의 핵심 내용인 ‘명확성의 원칙’ 위반).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배임죄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사례로 악용된 경우가 많다. ‘배임죄’ 폐지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합당한 일이다.

둘째, ‘사실적시 명예훼손죄’(형법 제307조 제1항)도 폐지해야 한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도 선진국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또한 위헌 소지가 크고 정치적 악용 사례가 매우 빈번하다. 종전에 ‘미투(MeToo) 사건’ 등에서 가해자가 적반하장 격으로 피해자를 고소한 사례들과 작금에 각종 정치적 사건과 관련해 고발된 사례들을 보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것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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