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 만세!"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외친 피맺힌 이 여섯 글자는 우리 선조들이 맞선 혹독한 시대상을 대표한다.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해도 감옥으로 끌려가 지독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일제강점기 비참한 현실이다. 인성을 상실한 일본군 만행에 신체가 찢긴 가족을 본 유족들의 마음을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남양주 화도읍 3·1만세운동 역시 다르지 않았다. 부당함에 맞섰던 그날의 정신은 34년째 ‘횃불 재현행사’로 이어진다. 선조의 한결같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려고 당시 상황을 복기해 본다.

남양주시에서 지난달 28일 열린 3·1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횃불 대행진’ 행사.
남양주시에서 지난달 28일 열린 3·1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횃불 대행진’ 행사.

# 월산교회서 울려 퍼진 3·1만세운동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시작한 독립운동 열기는 남양주에서도 격렬히 타올랐다.

1907년 선교사가 세운 월산교회가 ‘배인학당’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회 지도자인 김필규 목사와 이인하·이택하는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3월 16일 마을 지도자 이달용·이승보·이재하·이덕재·이택주·유인명·홍순철·윤태익과 봉기 방법과 시기를 논의했다.

하지만 누군가 밀고로 발각돼 이재하·이승보·이택하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에 격분한 답내리와 월산리 주민 200여 명은 고개를 넘어 마석우리 병참 앞으로 몰려가 체포한 인사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차츰 늘어나는 시위대에 일본군은 무차별 발포로 맞섰다. 이에 현장에서 이달용·손복산·신영희·유상규·이교직은 숨지고, 이재혁·윤균을 비롯한 상당수가 중상을 입었다.

사건 다음 날 시위에 가담한 김필규·이승면·강선원·윤성준·남궁우용·권은·이윤원은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상상을 넘어서는 일본군 고문과 형식에 치우친 재판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 근교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한 최초의 처참한 사건으로 기록된 우리 역사다.

월산교회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
월산교회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

# 그날 외침 재현한 ‘횃불 대행진’

당시 미금시 마석읍 3·1만세운동은 월산교회에서 시작한다. 교회 대표인 김필규 목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의 숭고한 정신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만한 행사가 ‘횃불 대행진’이다. 선조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1999년 2월 28일 길을 걸어 본 게 현재까지 이어진다.

단순히 월산교회부터 마석역까지 1시간 남짓한 길을 걷지만, 선조들의 피맺힌 한을 느껴 보는 유일한 행사다. 더구나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참가해 의미를 더한다. 선조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지인과 담소를 나누며 걷는 상황은 결코 오지 않았으리라.

34년 전부터 행사를 주최한 김풍호(67)월산교회 담임목사는 "화도 토박이로서 어린 시절 읍사무소의 기념비를 보고 자랐다.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려고 34년 전 기념예배를 거행했고, 이 행사가 커지면서 옛 마석읍사무소까지 행진해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삼창을 외치는 ‘횃불 재현행사’가 됐다"며 "남양주시와 문화원, 의정부보훈지청도 적극 동참한다. 처음 재현행사를 할 때와 비교하면 많이 발전했다. 선조의 정신을 마음속에 되새기고, 지역주민의 참여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 증언-독립운동가 후손이 기억하는 그날 

# 만세운동 선봉에 섰던 유상규 님 후손 유창노(86)님

 증조부 님은 답내·월산지구 3·1만세운동 의거 당시 선봉에 서셨다. 뜻 있는 분들의 의거가 누군가 밀고로 무산됐다. 뜻을 같이했던 분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주민 200여 명이 이들이 투옥된 병참부대로 횃불을 들고 몰려가 풀어 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일본군의 막무가내식 발포로 현장에서 돌아가셨다. 후손으로서 울분을 금할 길이 없고, 가족으로서 무척 암담한 상황이었다. 당시 유족을 모셔다 장례를 치렀는데, 증조부 님은 당시 39세밖에 되지 않았다.

 가장이 그렇게 허망하게 저세상으로 떠나다 보니 생활의 곤란함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중에 당시 상황을 목격한 분들이 뜻을 모아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옛 마석읍사무소에 기념비를 설치한 까닭은 당시 일본군 병참부대가 주둔했고 선조들이 투옥된 곳이기 때문이다. 기념비가 있는 곳 인근에서 일본군이 발포했을 테다.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경받아야 할 기념물로, 선조의 거룩한 뜻을 잊지 말고 더욱 소중하게 다뤄졌으면 한다.

# 김필규 목사 후손 김수한(65)님

 부모님께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1919년 3월 19일 새벽에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쳐 할아버지를 끌고 갔다고 한다. 상투머리에 끈을 매서 교도소로 끌고 갔고 투옥된 뒤 순국하셨다.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심한 구타로 살이 찢어진 흔적이 있었고, ‘가마때기’로 둘둘 말렸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 나이가 13세, 숙부님이 8세였다.

 가장의 부재로 아버지는 양평으로, 숙부님은 가평으로 생계를 위해 생이별해야 했다. 요즘 나이로 초등학생인데, 상상하기 힘들 만큼 어렵게 살아오셨다. 20대 중반 이후에나 만나셨다고 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현실에 안주하고 도전정신도 없고, 알바하며 PC방이나 다니는 청년들과 비교된다. 자기 앞가림도 힘든 상황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큰 용기여서 자랑스럽다.

 지금은 잊혀져 가는 역사인 듯싶어 안타깝다. 나라를 위한 중대한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출세보다 중요한 나라를 위한 마음이 계속 후세에 이어지길 바란다.

# 최초 만세운동을 모의한 독립운동가 이인하 님 후손 이용주(78)님

 월산교회 전신인 달뫼교회 영수(조직이 갖춰지지 않은 교회를 인도하는 임시 직분)였다. 3·1만세운동을 모의하신 분이다.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해외에서 들어오면 교회를 거쳐 갔다. 교회 여전도회 80여 명이 밤에 삯바느질을 해서 모은 돈을 독립운동가들이 순회를 하면 독립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유명한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오고, 유지들도 독립운동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서 독립운동 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에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다같이 만세를 부르자"며 주도하던 분들이 횃불을 만들었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하는 분들도 계시니, 우리가 나라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 모였기 때문이다. 결국 밤에 집집마다 다니며 만세를 부르러 가자고 동네 사람들을 규합했고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틀 뒤 순경들이 모의한 사람들을 색출하자 사람들이 사방으로 다 도망갔다. 아버지는 중국 간도로 이주해서 유랑을 하시다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당시 생활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교회 종까지 빼앗겼다. 전쟁물자를 공급하려고 쇠붙이는 모조리 거둬 갔다.

 한동안 교회 탄압이 심해 문을 닫았고, 예배도 못 드리게 하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이러한 선조들의 마음, 각자의 이익보다는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영원히 간직했으면 한다. 더구나 구전으로 전하기보다는 역사를 정확히 알고 학생들에게도 교육했으면 한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 <남양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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