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식 ㈔인천시서구발전협의회 회장
김용식 ㈔인천시서구발전협의회 회장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의 극한 대결에서 충돌이 불가피했으며, 자유민주진영과 공산주의진영 간 양보 못하는 결전의 전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테다. 그러나 민족사 최악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상처는 정전 70주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한국전쟁의 위대한 승전의 날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9월 28일 서울수복승전과 10월 1일 38선 북진 돌파를 손꼽을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기습에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6월 28일 수도 서울을 내줬고, 북한군 진격은 속도를 더해 8월 초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가 우리나라 존망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몰린 심각한 위기에서 극적인 반전으로 수세(守勢)에서 공세(攻勢)로 전승을 이룬 전쟁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 비사에는 우리나라 국군과 카투사(KATUSA)의 참전, KLO 첩보 부대원의 희생과 인천 어민들의 첩보 제공 등 작전 성공의 스토리가 차고 넘친다. 따라서 전쟁 초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구국의 전승이었으며, 인천시민의 승리라고 돼 있다. 서울 수복의 발판이 됐고, 북한군을 일거에 후퇴시킨 대승이라며 군사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인천상륙대첩(仁川上陸大捷)으로 재명명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으로서 함정 261척과 한국군 2개 연대, 카투사 병력 등 약 7만 명에 달하는 합동 상륙 기동단의 8개국 연합 상륙작전이자 최초 한미 연합 상륙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은 5천 분의 1의 성공 확률이라는 도박과 함께 조수간만의 차이가 7∼9m이고 개펄이 상륙 함정의 접근을 위협하는 최악의 상륙해안으로 적의 저항에 직면하면 전멸할 위험이 큰 작전이었으나 성공했다고 전쟁비사에 기록됐다.

세계 전쟁 사상 최고의 작전 성공이라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후방 병참선이 차단당했고,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이 개시됐으며, 북한군이 북으로 패주하기 시작함으로써 10만 명의 생명을 구한 전투임을 한국전쟁을 모르고 자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지금 인천에는 낙동강 전선의 북한 인민군을 일거에 후퇴시킨 미국 맥아더 장군의 작전 성공을 기념하는 자유공원에 맥아더 장군 동상이 세워졌으며, 전사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할 수 있는 유비무환과 안보의식 교육 장소로 인천상륙작전 기념비가 있다.

한국전쟁, 그 위대한 승리의 첫 단추가 인천상륙작전이었기에 역사적·군사적 재조명은 충분한 연구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인천상륙작전을 학술적으로 풀기 위해 유정복 인천시장이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장 박종선 장군(전 육군사관학교 교장 예비역중장)과 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해 그 전사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협업을 진행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 국민은 그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어 왔다. 105년 전 일본에 나라를 잃었고,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잿더미로 변했다. 하지만 우방 국가들과 함께 나라를 지켰다. 아직도 조국이 없어 세계를 떠도는 소수민족들을 보노라면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 삶은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제 우리는 민족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군 31만9천 명, 유엔군 15만9천 명, 민간인 37만 명이 사망하고 물적 피해 등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천상륙작전의 가치를 국제학술세미나로 재조명해 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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