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2023년 인천은 재외동포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지역 미래 발전을 지향하고, 그 적극적 방법의 일환으로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를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어느 때보다 재외동포들과의 교감, 인천시민의 독려와 협조 그리고 정부의 통찰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인천에 ‘재외동포청’이 자리해야 하는 이유와 명분은 다양하다. 입지적으로는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이 있어 이동과 접근의 편리함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공식적인 근대 최초 해외 이민의 귀착지 하와이 교포들의 후원으로 이민 50주년을 기념하면서 세워진 ‘인하공과대학’, 여기에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설립된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자리한다. 

더구나 1997년 조성된 사할린동포복지회관과 정착시설, 근래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한 고려인마을이 형성돼 이미 130년 전 중구 개항장에 조성됐던 청관(차이나타운)과 더불어 재외동포의 혼혈적 다문화의 확장성을 보여 준다. 또 최근 조성되는 송도국제도시의 아메리카타운, 유럽한인문화타운, 글로벌캠퍼스, 녹색기후기금 사무국 등 15개 국제기구는 재외동포와의 교감과 교류를 위한 친근성과 친친(親親)함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천에 자리해야 하는 중요한 논거(論據)는 역사성이다. 바다에 면한 인천은 B.C 18년 비류의 미추홀 정착부터 2천40여 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 속에 숱한 대외관계의 현장이었다. 백제시대 인천은 해양 교류의 창구로 기능하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백제가 그 수도를 충청도 웅진(공주)으로 옮길 때까지 100여 년 동안 현재 인천 연수구에 위치한 능허대(凌虛臺)를 통해 중국과 교류했다. 

일찍이 해로를 통한 대외무역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고려는 개성에 이르는 수로(예성강) 입구에 위치한 강화·교동·영종도를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거점을 정비해 갔다. 삼남(三南)의 물자들이 거의 대부분 서해를 통해 예성강을 거슬러 개경으로 수송됐고, 아라비아나 송나라 상선들 또는 고려 상선들이 모두 서해에서 강을 거슬러 수도 개경까지 직접 무역활동을 했다. 그러므로 영종도는 대중국무역의 무역항으로, 강화와 교동은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 인천지역도 ‘꼬레아’로 서방세계에까지 알려지는 고려시대 국제교류의 관문으로 자리하게 됐다. 특히 영종도에 송나라 사신들을 위한 영빈관인 경원정을 뒀던 점, 고려 후기 성리학을 들여오면서 교동향교에 공자와 제자의 화상(畵像)을 봉안한 점이 해양교류의 거점이었던 역사성을 보여 준다. 

19세기 중엽 이미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서양 여러 나라들의 통상 요구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인천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 됐다. 1883년 제물포가 개항되기도 전에 각국 외국인들이 교역을 위해 또는 이권 획득 등 여러 가지 명목으로 인천항에 밀려들면서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됐고, 인천은 서서히 국제도시로 변모해 갔다. 당시 맺은 일본·미국·영국· 독일 등과의 조약은 그 체결 장소가 모두 인천 제물포였고, 유일한 각국조계지, 최초의 외국 상사 이화양행, 최초의 서구식 대불호텔, 최초의 서양건축 세창양행 숙사, 근대식 각국공원과 하와이 이민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근대 문물이 수용되는 최초의 창구가 됐다.

인천의 역사적 정체성을 교류라는 측면에서 구할 때 해외 이민의 출구가 인천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라 백제시대 해양 교류에서부터 시작됐고, 근대 개항 이후 국제도시로의 경험 속에 대외 교류 창구로 기능하면서 신문물이 유입되는 입구가 된 동시에 디아스포라의 출구가 됐다.

2023년 현재 제물포에서 시작된 근대 최초의 이민은 120년의 역사로 남았다. 그 발자취를 되새기다 보면 2천40여 년의 인천 역사를 관통하는 ‘도전적 개척정신’이 재외동포들의 삶 속에도 스며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유대감이 세계 한민족 공동체와 인천을 결속시킬 또 하나의 중요 논거가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재외동포청’이 인천에 자리해야만 할 타당성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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