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펼친 선조들의 나라 잃은 슬픔을 현재 우리가 공감하기란 분명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폭압의 역사이고, 선조들의 굳센 의지와 정신은 대한민국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무심코 당연하다고 지나치는 ‘현재의 자유’는 피맺힌 절규가 가득했던 3·1운동의 결정체다. 남양주시 조안면부터 와부읍까지 이어졌던 ‘용진 3·1의거’ 역시 다르지 않다.

슬기롭게 나라를 보위해 반만년 긴 역사 동안 문화민족으로서 국권을 수호했지만, 1910년 경술년 국치에 왜적에게 국토를 짓밟힌 선조들의 투쟁의 역사다. 존경을 담아 그날의 기억을 되새겨 본다.

3·1의거 애국선열 추념탑.
3·1의거 애국선열 추념탑.

# 배나무 용진 3·1의거 현장

기념비 내용을 보면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종황제 승하를 계기로 1919년(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났다. 3월 7일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이종호 학생의 연락으로 배나무 용진(조안면)에도 의거 소식이 전해졌고, 이정성 장로와 교회 대표, 동리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기획했다.

당시 용진 의거 독립운동가 관련 판결문.
당시 용진 의거 독립운동가 관련 판결문.

경진학교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3월 15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거사 당일 교회와 동리 주민이 합심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외치며 진중리∼조안리∼봉안∼팔당을 거쳐 덕소면사무소와 헌병분견소 주위를 돌며 만세시위를 감행했다.

서울에서 출동한 일본군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참극이 벌어졌다. 선두에서 만세를 외치던 이정성·김춘경·김윤경·정일성 님이 현장에서 구속됐다.

다음 날 용진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주동자와 동리에서 연행된 사람을 합쳐 13명이 추가 구속됐다. 4월 25일 보안법 위반을 명목으로 이정성(41)·김춘경(26)·김현모(41)님은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김덕여(45)·정일성(18)·이갑동(25)·오성준(35)·김덕오(38)·이정운(36)·김윤경(36)·이건흥(34)·전태현(22)·김현우(39)·박경식(38)·문광채(59)·이내안(37)·박수만(23)님에게도 징역 8월의 실형이 언도됐다.

억울함에 상소했지만 기각되면서 20∼12개월을 서대문·원산·함흥형무소에서 각각 복역했다. 이들은 출옥한 뒤에도 국내외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지역 발전에 선구자 구실을 담당하며 굳건히 맞섰다.

용진교회 전경.
용진교회 전경.

# 판결문에 묻어나는 나라 잃은 설움

이강칠 씨 노력으로 확보한 육군박물관 사료 판결문을 보면 일본의 비상식 법치주의에 치가 떨릴 정도다.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유택작소’의 내용을 보면 양형 이유는 ‘피고 정성, 춘경, 현모 들은 양주군 와부면 일원을 순회하면서 크게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위해 기획하고, 압수한 구한국 국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불온한 동작을 해 안녕·질서를 방해한 자로 한다’고 적었다. 나라 국기를 들고 주권 회복을 위한 정당한 외침을 ‘불온하다’고 판결한 셈이다.

고법에선 해당 건에 대해 피고 17명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상고 취지에서 김춘경·김현모·김윤경 님의 굳센 의지가 확인된다.

‘피고 17명 상고 취지는 자기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의 근본의사를 발동해 범죄가 아닌데도 제1·2심에서 받은 유죄 판결은 부당해 복종하지 못하는 위법이므로 상고한다. 나는 조선민족이다. 조선민족으로 어찌 독립을 찬성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인도상 정의다. 정의 인도상 명확한 판결을 원한다’, ‘세계에서 부르짖는 정의 인도와 민족자결주의는 더구나 조선 민족에선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범죄가 되지만 하등의 이 같은 조문이 있지 않다’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던 일본이 우리 민족에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정신 나간 행태를 보인 꼴이다. 일본의 폭압에 분노한 선조들의 마음이 절실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배나무 용진 의거 기념비.
배나무 용진 의거 기념비.

# 배나무 용진 의거에 대한 역사 평가

1968년 3월 1일 용진교회가 중심이 됐던 ‘배나무 용진 의거’는 국가의 인정을 받았다. 1968년 유공자로 이정성 장로와 김춘경 선생, 김현모 선생 세 분과 문광채 선생에게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92년 4월 13일에는 정일성·이갑동·오성준·박수만 선생에게, 1993년 8월 15일에는 이정운·이건홍·김현유 선생에게, 1996년 3월 1일에는 김덕여·김덕오 선생에게, 1996년 8월 15일에는 김윤경 선생에게 각각 대통령 표창장과 개인표창 수장을 추서했다.

‘용진 3·1의거 애국선열 추념탑’ 역시 1994년 8월 14일 용진교회 재경신우회가 주도해 건립했을 정도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선조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이유다.

# 후손 이야기

# 문광채 님 증손자 문종선(76)님

증조부는 기미년 의거 당시 59세였는데, 연세가 높은데도 용진교회에서 모여 만세운동에 앞장서다가 잡혀 가시고, 옥고를 치르면서 8월형을 받았다. 

고문에 못 이기셨는지 옥사하셨다. 후손들은 직접 피부로 못 느껴도 얼마나 울분스럽겠는가. 아버님과 큰아버님 시신은 집에 가지도 못하고 다른 곳에서 화장을 하고 오셨다고 들었다.

애통한 마음이 가득하다. 증조부 때 집안이 엄청 부유했다고 들었는데, 제가 어렸을 땐 셋방살이에 5∼6명의 식구가 살았다. 그래도 나라가 발전하니 이렇게 산다.

선조들이 일제 탄압에 나라를 빼앗기고, 내 나라를 찾으려고 모였기에 현재 대한민국이 있다. 그분들은 목숨을 희생하면서 만세운동을 했는데, 지금은 3·1운동이 잊혀지는 듯하다. 앞으로라도 후손들이 선조들을 항상 기억했으면 좋겠다. 국가유공자를 건성으로 대하지 말고, 그들의 정신을 깊이 새겨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비전이 나오길 바란다.

희생이 헛되지 않게 값진 목숨이라 여기고 그 정신을 기리고 보전했으면 한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정부가 후손들에 대한 예우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계속 연계하고 계승하기 위한 정책 발굴도 이어져야 한다.

# 용진교회 5대째 장로 맡은 최남식(66)님

마지막까지 살아계셨던 박수만 씨가 말씀하시기를 "국가를 되찾는 일이 우리 책무다"라고 하셨다.

당시 일본군 형사가 교회에 체포하러 왔다. 예배 시간에는 들어오지 않고 끝난 뒤 연행했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다. "주권을 찾기 위해선 우리가 싸워야 된다"고 해 교회를 중심으로 덕소까지 나가서 만세를 불렀다.

현재 와부읍 덕소에 헌병출장소가 있었고, 500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선조들은 국가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다.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던 시절에, 잡혀 가면 고문당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감수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셨다.

후손으로서 선조들의 아름답고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며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마음에 가슴 깊이 죄송스럽다. 항상 ‘나는 잘못 살지 않나’ 반성하고 고향 땅에서 교회를 지키고 지역을 사랑하며 살아가겠다.

# 용진교회 김요섭(48)목사

당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큰 은혜 덕분에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살아간다. 역사 정신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그런 마음으로 1994년 8월 15일 ‘배나무 용진 3·1의거탑’을 세웠다.

처음엔 교회에 자리했지만 조안면 역사이고 많은 분들이 보고 기억하고 애국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2004년 송촌독립운동공원으로 이전했다.

아픈 역사지만 시대가 요구했기에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했다. 늘 어려운 분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하려 했다. 큰 교회는 아니지만 사회의 소금과 빛 노릇을 담당하고 시대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겠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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