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엽 ㈔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부총재
이경엽 ㈔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부총재

30년 전 알 파치노가 열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woman)’에서 그는 처음 본 여인에게 그녀가 쓴 비누향을 알아맞히고 태연하게 탱고춤을 청한다. ‘포르 우나 카베사(por una cabeza)’라는 음악과 그 무대가 된 호텔 레스토랑의 분위기, 여배우의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 그의 눈 노릇을 하며 아르바이트로 길을 안내하는 고등학생 청년의 호기심 어린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도유망한 영관급 장교 프랭크(알 파치노 분)는 사고로 시력을 잃고 퇴역 후 쓸쓸히 혼자 살며 추수감사절 연휴를 맞아 극단적 선택을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잠시 길 안내를 맡아 줄 아르바이트 고교생 찰리(크리스 오도넬)를 만나게 된다. 괴팍하고 다혈질이며 냉소적인 퇴역 장교와 부잣집 아이들만 모인다는 명문 고등학교의 가난한 학생이 가진 성실과 진정성, 비전, 꿈 그리고 여행길에서 나눈 대화로 젊은 청년의 미래를 설파하는 멋진 만남이 이 영화의 주된 흐름이다. 

몇몇 부유한 계층의 아이들이 교장선생님 차에 벌인 다소 지나친 장난에 학교는 상벌위원회를 열어 고자질한 학생에게는 상을 주고, 현장을 우연히 봤지만 친구들을 곤혹하게 만들까 끝까지 입을 다문 가난한 아르바이트 학생에게는 쉽게 퇴학 처분을 내리려는 순간, 학생을 학교 앞에서 내려주고 헤어졌던 퇴역 장교는 다시 학교로 차를 돌려 그 아이 부모 대신 자리를 잡고 상벌위원회에서 청년을 위한 마지막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당당하게 변론을 자원한다. "동료를 위해 용감하게 자신을 희생해 가려는 학생에게 퇴학처분은 너무 가혹하다. 장학금, 하버드대학 추천서까지 포기한 자기희생을 앞세운 리더의 자질은 바로 이 학교에서 정작 가르쳐야 할 가치가 아니냐"며 적극 엄호하고 만장의 박수를 이끌어 내 퇴학을 막아 준다. 할리우드 영화의 뻔한 결론이라 말하고 싶지만 가치와 리더에 대해 여유롭게 이야기해 준 그런 영화였다.

ESG 사회 부문에서 최근 두드러진 흐름은 기업 스스로 인권을 존중하는 경영체계를 서둘러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은 올해 들어 기업이 원자재 도입부터 제품 출하에 이르는 모든 생산 과정에서 인권침해 발생 여부를 심사토록 하는 ‘공급망 심사법’을 도입했다. 프랑스와 노르웨이는 이미 이전에 도입했고, EU 전체 국가로 확대된다. 최근 일본도 ESG 경영 차원의 인권존중지침을 마련했다. CEO와 구성원, 고객, 주변 관계자 모두에게 합리적 소통을 바탕으로 ESG라는 큰 개념을 이해하고 실천해 나가려는 의도에 방점을 찍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근대적 조직관리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흔히 갑(甲)과 을(乙) 구조의 수직적 조합이 상생과 동반성장, 수평적 양(兩)기둥(twin tower)으로 그려지게 될 테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가 가져올 앞으로의 기업경영은 4차산업과 인공지능을 지렛대 삼아 무한영역으로 확대재생산될 것이다. ‘노사관계’나 ‘갑을관계’ 같은 대립적 상호모순을 지닌 그런 설정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초개인화 시대정신’과 ‘기업가정신’이 상충과 대립을 떠나 같이 한곳을 바라보는 구조로 빠르게 개편된다. 

사실 인권경영이란 CEO, 구성원, 거래처, 관계자 등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충처리 안내, 의견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 결과를 얼마든지 얻어낸다. 프랑스 에너지그룹 ‘토탈’이 보여 준 우간다 유전 개발과 송유관 운송사업에서 보여 준 원주민을 대하는 태도, 즉 인권침해, 부당 대우, 현지 자연환경 파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법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법정서류 미비로 기각됐지만 힘(강자)의 논리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새로운 ESG 경영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어느 기업이나 CEO가 직원과의 이야기를 수시로 진행하지만 정말 이 시간만큼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 형식적이고 책임회피식은 안 된다. 세상 사는 선한 이야기를 가지고 철학과 인생관, 기업가정신을 자연스레 풀어가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기반한 고충처리 정도로 넘기기에는 선이 너무 굵다.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전화로 다짜고짜 내일 아침 몇 시까지 오라고 언성 높여 긴급호출하곤 막상 일찍 가면 나타나지도 않고 밤새 술이 덜 깬 모습으로 지각까지 하며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장황한 자기 이야기만 한다. 다른 사람의 자기희생적, 리더적 정신과 태도를 무시한 채 본인 이야기만 한다. 

인권 존중은 힘 가진 자의 마음 설계다. 겸손으로까지 이어가지 않더라도 "당한 사람이 당할 만하니까 당한 거지"라는 몰상식과 무례를 오히려 박수치며 환호하는 조선시대 천박한 노비관은 버려야 최소한 ESG를 논할 자격이 있다. ESG는 주변을 대하는 인권 존중의 마음 설계이며, 이 마음은 이야기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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