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우주, 기괴한 모습의 외계인, 반짝이는 최첨단 미래 도시는 SF 영화의 전형적인 이미지다. 화려한 시각적 스펙터클은 SF를 보는 맛을 선사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2022년에 개봉한 영화 ‘애프터 양’은 ‘미래답다’ 혹은 ‘SF답다’고 느껴지는 이미지의 작품은 아니다. 그곳은 절제된 흰색이 아닌 풀, 흙, 나무, 물, 하늘과 같이 자연을 닮은 포근한 색채로 가득하다. 의상도 신체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는 미끈하고 세련된 디자인이 아닌, 몸을 편안하게 덮어 주는 넉넉한 품의 아시안 스타일로 채워졌다.

다만 완전한 자율주행 시대로 진입했으며, 무엇보다도 진화한 형태의 AI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로봇의 외형은 인간과 차이가 없다. 때문에 가장 SF적인 요소에서조차 시각적 차별성이 부각되지 않는다. 자연친화적인 도심 속 인간과 꼭 닮은 로봇과 복제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애프터 양’의 세계다. 

전통 찻집을 운영 중인 제이크는 흑인 아내 키라와 중국인 입양 딸 미카 그리고 ‘양’이라는 이름의 아시안 남성 로봇과 함께 사는 중산층 백인 남성이다. 로봇 양은 딸 미카에게 중국인의 정체성과 뿌리를 가르치려는 학습용으로 구매했다. 하지만 양은 자신의 목적인 학습도우미를 넘어 미카의 큰오빠이자 아빠 노릇도 대신한다. 

그런 로봇이 어느 날 작동을 멈췄다. 친오빠처럼 양을 따르던 미카는 슬퍼했지만 부모에게는 기계 고장일 뿐이었다. A/S를 받기 위해 여러 수리업체를 전전하던 제이크는 결국 양의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최신 로봇과는 달리 양의 중심부에 기억장치라는 특수칩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에 인공지능 로봇을 연구하는 박물관 측에서 양의 신체와 기억장치의 대가로 금전 거래를 제안한다. 제이크는 긍정 검토를 약속하며, 가족의 사생활이 들어있는 양의 기억장치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거기서 영화 ‘애프터 양’의 이야기가 본격 전개된다. 양은 무엇을 봤고, 저장했을까?

기억장치 속에는 하루의 한순간이 3초간 저장됐다. 때로는 구름 한 조각, 창 틈으로 쏟아진 따뜻한 햇살, 나무 한 그루, 말라 버린 귤 껍질, 이슬이 맺힌 거미줄 등 어찌 보면 기록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이미지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속에 제이크의 가족도 있었다. 딸 미카의 성장이 담겨 있었고, 부부의 평안한 순간도 보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제이크의 집에 오기 전, 오랜 시간을 함께한 다른 가족과의 기억도 있었다. 

양의 기억과 시선을 따라가며 제이크는 삶에서 아름다운 순간, 중요한 시간은 사실 사소한 하루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관계를 맺어 온 양도 아내, 딸과 같은 한 가족이자 식구였음을 깨닫는다. 

영화 ‘애프터 양’은 한 로봇의 죽음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경계, 삶의 의미, 기억과 사랑의 가치, 가족 개념을 성찰하게 한다.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감독의 깊은 통찰을 담담하고도 아름답게 풀어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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