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는 시민으로서, 나아가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높이고 지역 정체성의 바탕을 이룬다. 남양주에 전해 내려오는 충혼정신이 주목할 만한 까닭이다.

국가 위기와 전란의 파고에도 선조들은 앞 시대의 정신을 잇고 후대에 귀감을 주는 삶을 살았다. 선조들은 전란통에도 ‘빛나는 역사’를 기록해 시민들에게 이어지도록 했다.

남양주시민의 의식 속에 그러한 선조의 얼이 서렸다. 남양주 독립운동사는 경기도는 물론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핵심을 차지한다. 역사에 기록할 만한 남양주 인물을 조명해 오랜 충혼의 전통을 되새겨 본다.

한음 이덕형 초상화.
한음 이덕형 초상화.

# 대대로 이어진 충신

외적의 침입이 많아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한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1335~1408)와 변안열(진건읍 역사인물)은 1380년 왜적을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토벌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변안열은 "적을 막는 일이 장수의 당연한 책무이지 상을 받을 일이 아니다"라며 받지 않았다. 이성계 측은 충절이 높고 무예에 뛰어나며 백성들의 신망도 두터웠던 용장 변안열을 회유했지만, 변안열은 끝없는 충절과 의지를 천명했다.

"내 가슴에 구멍 뚫어 동아줄로 꿰어매어/ 앞뒤로 끌고 당겨 이 한몸 가루가 된들/ 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변안열 ‘청구영언(靑丘永言)’ 중에서)

여기서 변안열은 가슴에 크게 구멍을 뚫고 줄로 묶어서 이리 끌고 저리 끌어가서 얼굴도 뭉개지고 갈려지는 고통 속에서도 만행을 저지르는 불의한 세력에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결국 이성계에게 사살됐지만 그의 충절은 후대로 이어졌다. 조안면 역사인물인 변협(邊協·1528~1590) 장군과 변응성(邊應星·1552~1616)장군 두 부자가 대표 격이다.

조선 선조 시절 3대 무장으로 꼽히는 변협이 북으로 가면 오랑캐가 숨 쉬지 못했고, 남으로 옮기면 왜적이 도망쳤다고 한다. 1584년엔 "10년이 못 돼 국가가 군란에 시달린다"고 예언했다. 을묘왜변에서 승전을 올린 장수로서 당시 상황을 복기해 조선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끝없이 탐낸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야 함을 강조했다.

# 위기에서 빛난 ‘외교’

구국의 역사 전통은 외교로 국난을 해결하기도 한다.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해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연소로 대제학을 지낸 조안면 역사인물 이덕형(李德馨)이 간판이다.

이덕형은 왜구가 몰려와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민심을 헤아리는 데 집중했다. 관료들보다는 백성의 안정이 먼저였다. 선조가 몽진을 할 때 정주에서 청원사(請援使)로서 명의 지원군 파견을 성사시켰다.

세계사에서 동서양 문명이 충돌한 전쟁으로 주목받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는 다시 호란이라는 전란에 빠졌다. 이때 김육(金堉·1580~1658, 양정동)은 명나라와 청나라 군사가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 벌어지는 중국 내부의 부패 상황을 직시했다.

"외적이 침입하고 안으로 도적이 들끓으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고통받는데 조정 대신들은 돈만 좋아한다"며 대국이던 명나라 멸망을 점쳤다.

김육은 외교 사절로 나가 대국의 멸망 과정을 지켜보며 자강불식(自强不息)에 뜻을 세웠고, 오랑캐라고 우습게 여기던 일반 사대부와 달리 청나라 우수한 점을 배워 국가를 강하게 만들려고 했다.

변안열 장군과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를 기려 세운 황산대첩비 탁본.
변안열 장군과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를 기려 세운 황산대첩비 탁본.

# 외세에 굴하지 않은 남양주 지조

인조반정 이후 지세가 험하기로 이름난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3번이나 지내며 10년 동안 안정시킨 인물이 ‘이항(퇴계원)’이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에서 민심은 이반한 상태였지만, 이항은 선비 정신에 맞춰 독실하고 재물욕을 부리지 않는 인간다운 모습으로 칭송 받았다.

절도사 시절 회녕(會寧)에선 후금(後金·중국)이 시장을 열지 못했다. 이항이 ‘연구보국(捐軀報國·이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의 자세로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다.

청나라 무력에 굴복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임금 앞에 삼전도 결사항전을 주장한 김상헌(와부읍)은 의롭게 죽기를 맹세했다. 삼양에 잡혀 온 김상헌은 겁박하는 청나라 관료에게 "나는 나의 지조를 지키고 우리 임금을 위해 충언할 뿐이다"라고 일갈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최명길과 함께 청나라 황제에게 인사했을 때도 김상헌만 무릎을 꿇지 않고 꼿꼿이 선 자세였다. 최명길이 눈치를 주고 팔꿈치로 치며 절을 하라고 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김상헌 죽음에 대해 "중국 사람 문천상(文天祥)이 절개를 지킨 사람으로 유명한데, 그 이후 300년이 지나 김상헌 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송했다.

그의 절개와 강직함은 대대손손 내려가 김창집·김제겸으로 이어진다. 1905년 조선특사에 이토 히로부미가 파견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막기 위한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을 제시하고 날인을 요구하더라도 뜻을 굳게 갖고 큰 용기를 내 지난날 청음(淸陰) 김상공(김상헌)을 본받아 조약문을 찢어 버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꾸짖으라고 그에게 전하라"(이관직, 「우당이회영실기」 중에서)는 발언이 나온다. 국난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위한 본보기를 보인 김상헌은 남양주의 충정을 일깨운 일화로 남았다.

# 충효(忠孝) 실천

동아시아 국제 정세 혼란기에 조선을 국난에서 구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수석동)선생의 적통을 계승한 인물이 이석영(李石榮·1851~1934, 화도읍)이다.

1910년 8월 나라를 빼앗기자 조국을 떠나 토지 6천 석과 집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다. 원수들 앞에 아부하며 살지 못해 비분강개함으로 대한 독립의 뜻을 만주에서 펼쳤다.

이석영의 가슴에 가장 중요한 글자는 바로 충과 효였다(권상우, 「기려수필(騎驢隨筆)」 참조). 1910년 조선은 국권을 상실했지만 이완용·이지용 따위 친일파들은 귀족 작위와 일제에 대한 공로로 은사금을 받았다.

1913년 다나까 코죠의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 따르면 일본의 강제 병합 이후 조선 황실 가족 말고 일본에서 작위를 받은 조선 벼슬아치만 69명이다.

반대로 조선 최고 명망가의 인물로 높은 관직을 지내 호화로운 생활을 얼마든지 이어갈 만했던 홍순형(洪淳馨·1857∼1931)은 "우리 폐하께서 애초에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사실과 해당 조약이 인정받을 만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소서"라며 조약 무효를 외치고 낙향해 나라에 대한 근심으로 여생을 보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항전을 주장한 김상헌의 간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항전을 주장한 김상헌의 간찰.

# 보훈기록 중요성

국난을 맞아 실천하는 삶을 보여 준 ‘남양주 충혼 정신’은 나라를 유지시키는 국가의 주석(柱石)이었다.

이항복은 비굴하게 야합해 세속의 욕망을 이루는 짓을 수치로 여기고, 지난날과 앞날의 걱정을 한순간이라도 잊으면 폐망한다는 생각과 ‘공심’(公心, 공평한 마음)으로 백성을 안정시켰다.

선조들은 사실을 근거로 한 공정한 기록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명백한 사실을 기록해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의식으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장에서 공을 세운 실제 주인공의 공훈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이항복의 「논난후제장공적(論亂後諸將功蹟)」이나 사절(死節)을 비롯해 17개 표제로 나눠 남자 78명, 여성 8명의 면면을 기록한 구사맹(具思孟·1531~1604)의 「난후조망록(亂後吊亡錄)」을 보면 알 만하다.

이러한 보훈기록은 국가 체계가 붕괴하고 혼돈 상태에서 조사하고 자료를 모아 분류와 선별을 거쳐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소개함으로써 문학·사회사·전사(戰史)·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오늘 우리가 보훈의 가치를 되새기고 잊혀 가는 충정을 기록하는 일이 소중한 까닭이다. 국난에 앞장서는 실천의식과 그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업은 남양주시민의 내면에 각인된 정신문화이자 지역 정체성의 핵심이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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