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엽 ㈔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부총재
이경엽 ㈔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부총재

얼마 전 서울어린이대공원 동물원을 탈출한 세 살배기 얼룩말 ‘세로’가 장안의 화제가 됐다. ‘초식동물 마을’이라 이름 붙인 우리를 부수고 탈출해 서울시내를 3시간 동안 활보하다가 다시 돌아온 탕아(?) ‘세로’는 이미 스타가 됐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집단으로 서식하는 동물을 혼자 가둔 채 생활하게 한 원초적 잘못과 사육 관리 책임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주된 화제는 우리 탈출 원인과 과정, 내용이었다. 마침 공원 바로 옆 학교 중학생인 손녀딸을 데리러 갔다가 시간이 조금 남아 ‘세로’ 우리를 호기심에 찾아 나섰다. 주차장에서 5분 정도 걸어가자 A4용지에 "세로가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란 문구만 펄럭이고, ‘세로’가 신경질을 부리며 옆 우리 친구와 싸웠다는 당사자 캥거루 역시 멀뚱하니 머리를 내려놓고 혼자 쉬고 있었다. 결국 그날은 보지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이내 다시 우리에 모습을 나타낸 ‘세로’는 그를 보려는 사람들의 성화와 격려로 스타 대접을 받고 있는 듯했다. 

지금도 ‘세로’ 우리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한다. 원래 이런 문제가 불거지면 동물 사육에 관한 관리 책임이나 문제점, 시설물 개·보수에 대한 대응책, 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가지고 매스컴과 관계 당국에서 다투듯 다뤘을 텐데 어찌 됐는지 이 사건과 대중의 반응은 그냥 훈훈하면서 아련하게 미담으로 포장되기 시작했다. 담당 사육사는 공식 석상에서 탈출 동기가 뭔가에 깜짝 놀라 돌발적으로 일으킨 행동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대중은 최근에 ‘세로’가 부모를 잃었고 사춘기에 접어들어 나름 황망하고 쓸쓸하며 슬프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주는 밥도 안 먹고 딴청부리며 옆 집 캥거루에게 성질 부리며 싸우기도 했다는 의인화로 결론을 냈다. 

‘세로’의 사례는 경영에서 분석기법, 관점설계, 데이터, 직관 등 개념들을 상황별·시차별로 어떻게 단계와 경중을 따져 가며 접근하느냐에 따라 ESG 경영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음을 분명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친환경과 그린워싱(친환경인 척 위장하기), 사회적 가치와 몰가치의 기준, 정도경영의 합리적 구분 잣대, 이 모든 것이 본질 추구와 상황논리의 설득인 셈이다. 보이는 환경을 생각하자면서 보이지 않는 그 반작용은 예측을 못하고 방기하는 일, A에서는 안정(편안함)인데 B에서는 폭력(선의로 포장된)일 수 도 있는 사회적 가치, CEO의 인식 방향에 따라 정반대 경우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정도경영 이 모든 것이 양면성, 이분법 같은 논리로 설명된다. 어떤 누가 무슨 근거로 정답과 오답을 명쾌하게 구분 지을까?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ESG 경영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경영계획, 목표, 성과, 인사,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기승전결의 뼈대와 구성이 이야기로 풀어가면서 전달되고 착안되며 실천으로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은행 지점장 시절 새로운 지점으로 인사명령을 받고 이동했다. 전임 지점장이 사고로 사법처리되는 일까지 벌어지자 직원들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실적은 답보 내지 감소였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내몰기보다 우연히 지점장실 뒤편 정원 창을 통해 왜소하고 초라한 열매의 사과나무를 보며 직원들에게 얘기한 게 전부였다. "명색이 사과인데 대추보다 작은 열매를 달고 있네. 내년엔 잘 가꿔서 주먹만 한 사과가 달리게 하자!" 부임 실적 비교니 기간별 목표 달성 비율이니 하며 나서기보다 어차피 해야 할 일, 어디 한번 같이 진지하게 해 보자란 의미를 부여하자 성취 동기, 진지함이 더해졌다. 

이듬해 봄, 직원들은 가끔씩 사과나무 뿌리 밑동 주변에 집에서 가져온 한약 찌꺼기나 물, 거름을 다져 주며 일상 분위기도 급속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업무보고 횟수와 진행의 질이 달라졌다. 그해 가을 기적같이 주먹만 한 열매가 탐스럽게 열린 것을 보고 너나 없이 신나 하고 격려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긍정의 힘을 믿는 과정에 조금씩 나아지는 내용(실적)을 직접 겪으며 ‘같이의 가치’를 서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2년 만에 실적을 두 배로 키우고 임원 후보자 점포장으로 다시 발령이 났다. 같이 일한 직원들 역시 포상과 해외여행, 승진 등 손에 닿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냈다. ‘과정’과 ‘내용’이 합쳐져 ‘의미(가치)’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직원, 고객, 주변 관계인들에게 쉽고 진정성 있는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 자산을 키워 보자. 뻔한 길 돌려 말한다고 선의의 과정으로 포장될까? 진정성과 미래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현란한 솜씨로 꾸며진 보고서라 해도 CEO의 이야기가 담보되지 않으면 허접해 보인다. ESG 경영은 이야기와 공감성의 연계 확산이다. 얼룩말 ‘세로’에게 새 친구가 생겨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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