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절망스러웠으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걸까요? 종종 뉴스에서 가족들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지 그랬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드시 이 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억지로라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뿌리 깊은 희망」(차동엽)에서 저자는 자살을 결심한 어느 남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 남자가 자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업에 큰돈을 투자했다가 가진 모든 자산을 잃었고, 부인은 회사에서 해고 통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어떻게 실패에서 벗어나는가」라는 책의 저자만큼은 답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그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자기가 도울 수 없다면서 다른 사람을 소개하겠다며 남자를 거울 앞으로 데려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당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단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차분히 관찰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 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 사람에게 물으십시오."
맞습니다. ‘살겠다’와 ‘죽겠다’의 두 갈래 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자신을 신뢰하는가, 불신하는가에 따라 선택은 달라집니다.
저자는 쇼펜하우어의 "진정한 희망이란 바로 나를 신뢰하는 것이다. 행운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을 따른다"라는 말을 들려줍니다.
신(神)은 그 사람이 견딜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해도 그곳에서 벗어나는 힘 또한 나에게 이미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 과정 역시 무척 힘겹고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끝에는 어김없이 성장과 성숙이라는 보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견뎌 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지혜 이야기」(치우칭지엔)에 성공에는 출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동화 같은 사례가 나옵니다.
어린이파티장에서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 아빠는 의회의 시종관이야. 아주 높은 직위라고. 성이 ‘센(Sen)’으로 끝나는 평민 출신 사람들은 영원히 큰 그릇이 될 수가 없어. 그러니 평민들 앞에서는 늘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 섣불리 접근할 수 없도록 거리를 유지해야 해."
"하지만 우리 아빠는 너희들 아빠뿐 아니라 그 누구의 아빠도 신문에 나게 해 줄 수 있어. 각계각층 인사들이 우리 아빠를 두려워해. 어떤 기사를 신문에 낼지는 순전히 우리 아빠 마음이거든."
그때 문틈으로 몰래 파티를 구경하던 한 소년이 중얼거렸습니다. "나도 저 아이들 틈에 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년은 평소 주방 청소를 해 주고 주방장에게 잘 보인 덕에 겨우 허락을 받고 그곳에 들어왔지만, 파티에 참석한 아이들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소년이 바로 성이 ‘센’으로 끝나는 평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때 그 소녀들이 숙녀가 된 어느 날, 그들 중 몇 명이 금빛으로 휘황찬란한 성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성 안에는 아름다운 예술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었고, 그들은 거기서 그 작품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주인은 바로 그때 그 소년이었습니다. 이제 위대한 조각가의 신분으로 그들에게 추앙받는 인물이 돼 있었던 겁니다. 바로 덴마크의 위대한 조각가인 베르텔 토르발센이었습니다.
금수저 가문에서 태어나면 여러 면에서 유리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은 아픈 경험들입니다.
아픈 경험이 절박한 희망을 만들고, 그 간절한 희망이 열심히 노력하게 하는 끈으로 이어져 결국 성장과 성숙이라는 보물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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