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가을, 뉴욕 자택에서 갈퀴로 낙엽을 긁어 모으던 윌 듀런트에게 잘 차려입은 남자 한 명이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라고 했다. 저명한 철학자인 듀런트가 자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 주지 못한다면 말이다. 얼마 뒤 듀런트는 세계 각계 셀럽 100인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인생의 의미 혹은 가치는 무엇일까요? 당신의 영감과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하며, 당신을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 혹은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합니까?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철학자와 과학자, 작가, 음악가, 정치인, 언론인, 배우, 종교인과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질문에 답을 보냈다. 듀런트는 그 답변을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었다.

배우이자 극작가, 영화제작자, 칼럼니스트인 월 로저스는 "인생이란 결국 한바탕 야단법석"이라는 답을 했다. 그러니 웃을 일을 만들자고, 가능한 최선을 다하자고, 아무 일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고 말이다. 그는 더욱이 "하나의 이상에 헌신하지 말자"고 강조했다. 그건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신기루를 향해 말을 달리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뉴욕 한 교도소 종신형 죄수한테서도 답장이 왔다. 오언 C. 미들턴은 "내가 인간의 생명이라는 이 거대하고 놀라우며 꾸준한 상향 운동에서 분리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인식, 역병이나 신체 고통이나 절망이나 감옥조차도, 그 무엇도 이 구실을 내게서 빼앗아 가지 못한다는 인식이 내게는 위안이자 영감이자 궁극의 가치"라고 했다.

종교인인 존 헤인즈 홈스는 ‘거짓, 위선, 불의, 사악한 행위를 봤을 때 격렬한 불꽃처럼 타오르는 자신 안에 무언가’를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꼽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살아간다는 그의 인식은 질문의 시작점인 듀런트 시각과도 맞닿는다. 듀런트는 "삶의 의미는 우리가 더 큰 존재를 위해 생산하고 이바지하도록 부여받은 기회 속에 있다"고 봤다. 그 존재란 개인의 잠재된 존엄성을 이끌어 내고 그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대의를 부여한다.

이렇듯 인생을 바라보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오히려 "왜 살아야 합니까?"하는 반문이 돌아올 만큼 답하기 어려운 난제다. 혹자는 질문 자체를 어리석게 여기기도 한다. "태어났으니까 산다"고 답하면 이마저도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각자 다르게 정의한 인생의 의미를 보노라면 한 번쯤은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스스로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평생 남들이 부여하는 의미만 쫓다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 정의 내리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 삶이 신기루일지, 상향 운동일지, 기회일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일지, 고민하는 주체로 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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