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고 살아간다. 당시의 합법과는 무관한 판결문을 보거나 목격자 증언만 들어봐도 일제는 역사에 기리 남을 ‘폭압과 만행’을 저질렀다.

선조들의 충정과 고통스러움을 천만분의 1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남양주시 진접읍에서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를 주축으로 일어난 만세운동도 그와 다르지 않다.

명백히 정의로운 ‘조국의 독립’을 외쳤다는 이유로 스님들마저 모진 고문을 당해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인간다움은 철저히 내팽개쳐 버린 일본에 맞선, 애국충정으로 총칼에 맞선, 진정한 큰 어른을 만나본다.

봉선사 전경.
봉선사 전경.

# 봉선사에서 시작한 진접읍 독립만세운동

지난 1919년 3월 29일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 인근 마을에 조국 독립을 위한 격문(檄文)을 배포했다. 봉선사 승려 김성숙(金星淑·운암스님)은 평소 뜻을 같이 한 이순재(李淳在·지월스님), 강완수(姜完洙), 김석로(金錫魯), 현일성(玄一成)에게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 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으니 조선도 일제에 대한 항거를 계속해 자주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취지의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항일 만세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는 데 합의한 그들은 봉선사 서기실에 비밀리에 ‘조선독립단임시사무소(朝鮮獨立團臨時事務所)’를 차렸다.

지월당 재순화상 건국 유공 행적비
지월당 재순화상 건국 유공 행적비

이후 등사판을 이용해 ‘3월 30일 광릉 안 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니 모두 나오라’는 내용의 유인물 200매를 제작해 29일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까지 진벌리를 비롯한 4개 동리에 배포했다.

드디어 30월 30일 주재소 앞 광릉천변에는 주민 1천여 명이 모였다. 만세를 외치는 주민들에게 일본경찰은 폭력으로 맞섰고, 김성암을 비롯해 다수가 체포됐다. 제1차 만세운동이다.

3월 29일 접동리 이재일(李載日)은 ‘거주하는 동리 주민 일동이 광릉천(光陵川) 강가에 모여서 독립만세 외치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받았다.

그 즉시 동리 주민과 내용을 공유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31일 광릉천 자갈밭에 100여 명이 모여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부른 이재일·최대봉·박석봉·최대복·유희상·이흥록·최영갑·양삼돌을 비롯해 주민 다수가 체포된 ‘제2차 만세운동’이었다.

금곡리에서도 청년 13명을 주축으로 400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됐다. 당시 3·1운동 전국 확산을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일본은 엄중한 감시망을 형성했지만, 선조들의 뜨거운 고국충정 의지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 불합리로 무장한 일제 ‘만행’

봉선사 서기실에서 비밀 회합을 열어 독립운동 당위성을 제작한 스님들은 조국의 독립을 열망했다는 대가로 부당한 옥고를 치렀다.

운암스님은 1919년 9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지월스님도 같은 해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진접중학교에 있는 3·1운동 기념비.
진접중학교에 있는 3·1운동 기념비.

더구나 지월스님은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수형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3년으로 형량이 늘어났다고 알려졌다.

옥에서 자행한 지독한 고문으로 지월스님은 오른쪽 볼에 구멍이 생겨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시위에 동참한 주민, 가족을 잃은 가족들의 원망도 묵묵히 감수해야 했다.

지월스님은 1944년 7월 25일 봉선사에서 세수 54세 나이로 입적했다. 1986년이 돼서야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스님들이 독립운동에 직접 나선 까닭은 유공비에서 가늠이 가능하다. ‘(중략)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은 화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때 마침 서울에 유학 중이던 태허당(太虛堂) 성암(星岩) 화상의 귀향으로 사정을 알게 된 화상은 분연히 일어나 만세 운동을 일으키시니, 지역 항일운동의 기폭제이기도 했다.’ 봉선사 스님들의 움직임은 경기 북부지역 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 향성스님에게 듣는 봉선사 만세운동

지난 1990년대 초반까지 봉선사에선 3·1만세운동 기념식을 거행했다. 당시 학인(학생)으로서 궁금해 어른 스님께 여쭈니 봉선사 주도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고 말씀하셨다.

조선임시독립사무소를 작명한 주체도 스님들인데, 봉선사 명의로 유인물을 제작한 건 당시 31본사 중 하나로 한수 이북지역을 관리하는 본사여서 서기실에 ‘등사기’가 있었다.

운암스님이 파고다 만세운동에 참여하거나 또는 듣고 난 뒤에 돌아와서 ‘봉선사를 주축으로 만세 운동을 벌이자’는 데 합의했다.

지월스님이 가장 연세가 많았는데 당시 29세, 운암 스님이 22세였다. 그분들이 왜 섰는지 찾아보니, 당시 주지였던 월초스님께서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 선생과 인연이 각별했다고 한다.

가끔 오셔서 차담을 나누시는데, 이 스님들이 차를 내어 드리면서 내용을 듣고 일찍 세상을 깨우치셨나 보다. 그런 영향으로 3·1운동을 참여하고 주도했다고 생각한다.

무장경찰 진압에도 스님들은 굴하지 않았다. 지월스님은 체포될 때도 오른쪽에 태극기를 꽂고 갔다고 들었고, 형량을 받고 나와 끌려갈 때까지 독립을 외쳤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문으로 오른쪽 볼에 상처가 났는데, 수술을 받지 못해 구멍이 나서 공양을 하실 때도 불편해 하셨다.

보훈정책 변화에 대해선 ‘후손에 대한 정책’을 논하고 싶다. 독립운동가들은 전 재산을 헌납했다. 재산도 그렇지만 신분도 숨겨야 했기에 자손들이 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가난하게 살았다.

보훈정책은 대부분 자식 대에서 끊기는데, 이미 70년이 넘으니 손주들이 주를 이룬다. 그분들이 어렵게 살게 된 까닭이 독립운동인데, 후손들이 여유롭지는 못해도 빈궁하지 않을 정도로 보훈정책을 대대손손 이어가야 한다.

일례로 운암 스님은 임종국무요원까지 역임했는데, 진보 계열에서 활동하면서 정부에 의해 굉장한 탄압을 받았다. 말년엔 기거할 집도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는데, 동지들이 한 두 푼 모아 지은 집 이름이 ‘피구정’(비를 피할 정도의 집)이라고 한다. 결국 돌아갈 때까지 힘들게 살았는데, 현대 후손들도 어렵게 살아가는 상황은 개선해야 한다.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 자신의 모두를 바친 분들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보다는 점점 젊은 학생들이 그런 의식들이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입시 경쟁과 취업 경쟁에 내몰리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사실과 한국전쟁 들에서 헌신한 분들의 기억이 점점 멀어져 간다. 교육보다는 국가 정책과 관심의 문제다.

호국보훈의 달에만 보훈을 생각할 일이 아니다. 어른 스님들은 ‘교육과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행사도 대통령이 참여하는 행사가 중요도가 높은 이치와 마찬가지다. 최고 지도자가 보훈행사에 직접 참여하면,  국민이 봤을 때 ‘대단한 일이구나’하는 인식이 있다. 윗사람부터 모범을 보이면 당연히 이어지리라 본다. 단순히 얼굴만 비치는 그런 행사는 지양함이 마땅하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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