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은 기다림이 많았다. 수원이 고향인 기자의 학창시절 만남의 명소는 (지금은 없어진) 남문 중앙극장 앞이었다.

많은 청춘들이 그곳에서 만나 영화 보러, 밥을 먹으러, 차를 마시러 가거나 어른이 된 뒤에는 당구장이나 술집으로 출발하던 곳이다.

간혹 약속 장소에 늦게 나가거나 상대방이 늦게 나오게 되면 대책 없이 기다리거나 갈 만한 장소를 수색해야 했다.

대학 시절엔 주된 약속 장소가 수원역에서 서울까지 커졌다. 서울로 진출할 때는 주로 종각역 종로서적 앞에서 만나 이동하거나 신촌 대형 맥줏집에서 만났다.

당시는 이런 만남의 장소에 설치한 게시대가 메신저 구실을 했다. 약속 장소에 늦게 나가거나 술자리가 바뀌면 게시대 메모지에 친구 이름이나 모임 이름을 써 놓고 옮긴 자리로 오라는 메시지를 붙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모임 장소를 정하는 데 신중했고, 한번 잡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약속이 어긋나면 어긴 친구나 상대방 모두 하루를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약속의 연속이다. 사람들이 지켜야 할 기준인 법도 사회 약속이고, 직장을 얻거나 선거에서 당선한 이는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자기 자신과 약속을 한다.

그러나 이 모두를 지키고 살아가는 이는 드물다. 신념이 흔들려서, 경제문제로 또는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 약속을 하기도 한다.

수많은 약속이 이뤄지는 인생에서 살아가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하지만 지키기 힘든 약속이 결혼 서약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평생 서로 사랑하겠느냐는 주례 질문에 ‘네’라고 답하지만,  죽는 날까지 유지해야 하는 두 사람 관계이기에 이를 지키기란 녹록지 않다.

눈에 콩깍지가 씐 신혼 시절엔 알콩달콩 잘 산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육아 문제로 많이 다툰다. 남들만큼 잘 입고 잘 먹는 생활을 하기 힘든 경제상황으로 가정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친다. 예쁘고 멋진 주변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는 경우도 있다.

공원을 걷거나 도로를 건널 때 파뿌리 같은 머리를 한 부부가 손잡고 함께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 세 집 걸러 한 집은 이혼해 온전한 가정을 유지하기 힘든 요즘, 인생의 평지풍파를 넘어 서로를 위하고 의지하며 사랑의 약속을 평생토록 지킨 모습으로 보여서인지 아름다운 사진 같은 장면으로 가슴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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