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모 개항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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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박물관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장을 세 차례나 역임한 홍진 지사의 묘비가 수장(收藏)돼 있다. 묘비에는 "청년 동포여 병든 나라를 고치는 병원의 일꾼이 되자"라는 문구가 있다.

홍진이 1931년 임시정부 활동으로 중국 길림에서 머물며 한 말이며, 그가 별세한 1946년 새겨졌다. 

비석은 3단으로 구성됐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과 어록이 새겨진 화강암 받침대 그리고 기단이 있다. 비석의 높이는 94㎝, 너비는 45.5㎝다.

홍진은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에서 개최된 13도 대표자대회를 주도한 인물이다. 이 당시 홍진의 이름은 면희(冕憙)였다. 3·1독립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수립되거나 수립을 준비하던 여러 임시정부 중 하나인 이른바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예비 작업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4월 2일, 천도교 대표 안상덕과 기독교를 대표하는 박용희·장붕·이규갑·홍진·권혁채 그리고 유림 대표 김규 등이 참석했다. 또 각 지역 대표로 수원·강화·인천 등 인근 지역에서 10여 명이 참석했다. 비록 여러 정황으로 온전한 대표자 대회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13도 대표자대회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절차를 거친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후 홍면희는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상해로 망명을 하게 된다. 홍면희는 압록강을 건너면서 이름을 진(鎭)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홍진은 1921년 5월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됐고, 1922년 8월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됐다. 또한 1926년 7월 8일 국무령에 취임해 임시정부의 행정수반이 됐다. 임시의정원 마지막 의장을 역임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홍진의 역사성은 당파를 초월해 독립운동의 여러 분파를 통합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는 점이다. 

홍진은 1942년 독립운동의 양대 축이었던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 간 통합회의에 조소앙, 차이석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참여했다. 조선민족혁명당에서는 김원봉, 성주식, 최석순이 참여한 가운데 양당의 당(黨)·군(軍)·정(政) 통합을 잠정적으로 합의했다. 물론 여러 조건으로 인해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통합회의에서 이뤄 낸 일부 합의 조항은 임시정부로의 대통합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1942년 10월 개최된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인사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회의에 참석했던 것이다.

또한 홍진이 1945년 12월 1일 환국하면서 가져온 의정원 문서는 유족이 보관하다가 국회에 기증해 1974년 국회도서관이 발간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 개정안 초안(원본)과 건국강령 그리고 광복군 작전보고 등의 자료들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홍진의 철저한 역사의식 하에 무사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홍진은 귀국 후 1946년 9월 9일 병환으로 서거했다. 명동성당에서 장의위원장 김구 집례로 홍진의 장례 미사가 거행됐다. 홍진의 유해는 증조부 홍우순(洪祐順, 1791~1862)의 선영이 있는 문학산 자락으로 운구됐고, 오후 3시부터 진행된 안장식은 오후 4시 50분에 끝났다(대중일보 1946년 9월 15일자).

1962년 독립장에 서훈됐고, 1994년 10월 6일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 묘소로 이장됐다.

임시의정원 100주년인 2019년에는 마지막 임시의정원 의장인 홍진의 흉상이 대한민국 국회 내에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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