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광릉숲에 자리잡은 봉선사는 한수 이북을 대표하는 사찰이자 대한불교조계종 31본산의 하나다. 대한민국 독립 역사에 가장 큰 뿌리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

누구보다 나라의 앞날을 고심했던 월초 스님부터 만주를 드나들며 전투에 참여한 운허 스님까지. 봉선사 스님들의 애국충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제자와 후대의 삶까지 살폈던 선지자다운 마음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봉선사의 뿌리 깊은 애국정신을 들여다본다.

봄이 한창인 봉선사 전경.
봄이 한창인 봉선사 전경.

# 한수 이북 애국충절 상징 ‘월초 스님’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한국전쟁까지 봉선사는 단 한 번도 국난을 피하지 못한 채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홍월초(洪月初·1858∼1934년)스님 덕분에 애국충절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월초 스님은 동국대학교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과 이사장을 맡은 인물이다.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고 불교, 기독교, 신문물이 밀려들자 한국 불교의 근대화 기틀을 바로 세운다.

일본 불교의 장점만 취하고 조선 불교의 고유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옛 교육’에 중심을 뒀다. 이와 함께 전 재산을 봉선사에 헌납해 ‘홍법강원(弘法講院)’을 비롯한 다양한 사업을 펼친다. 봉선사 주지를 5대까지 역임했을 만큼 근대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월초 스님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독립운동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임했던 두 명의 제자가 바로 운허(耘虛) 이학수(李學洙·1892∼1980년)와 운암(雲岩) 김성숙(1898∼1969년)이다.

봉선사의 옛 모습.
봉선사의 옛 모습.

# 독립운동에 진심인 ‘운허 스님’

운허 스님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04년 13살에 결혼한다. 일제의 폭압이 이어진 1910년 평양 대성학교에 입학했지만, 2년 뒤 105인 사건으로 교직원과 학생들이 한꺼번에 체포되자 중퇴한다.

이후 만주지역을 대표하는 환인현(桓仁縣) 동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13년 6월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본격 시작한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랴오닝성 신빈현 왕청문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등사판 ‘경종(警鐘)’을 발행하고, 당시 남만주 독립운동 중심지인 유하현 삼원보에서 군정부에 가담해 기관지 ‘한족신보(韓族新報)’를 간행한다. 1920년에는 독립운동기관으로 유명한 광한당(光韓團)을 조직하면서 애국투사들을 이끈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핵심인 운허 스님을 잡으려고 일본 경찰이 나서자 귀국해 1921년 강원도 회양군 봉일사(鳳逸寺)에 은신하면서 8년간 불교에 전념한다.

역시 독립운동 피가 들끓었는지 운허 스님은 전국불교학인대회(全國佛敎學人大會)를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서 열어 ‘학인연맹(學人聯盟)’을 조직했다. 1929년엔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보성학교 교장을 맡았고, 같은 해 겨울부터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가입해 더욱 치열한 독립운동에 돌입한다.

그러다 만주국이 건립돼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1936년 월초 스님의 유촉(遺囑·죽은 뒤의 일을 부탁함)에 따라 불교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낸다.

운허 스님이 국내 은신 중에 개최한 조선불교학인대회.
운허 스님이 국내 은신 중에 개최한 조선불교학인대회.

# 운허 스님과 계몽·개혁

운허 스님은 극심할 정도로 열악한 경제 여건에서도 불경을 번역하는 ‘역경(譯經)’ 사업을 시작한다. 누구나 쉽게 불경을 이해하도록 번역하는 일이 나라 발전에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1957년 7월 시작한 역경 사업은 1961년 국내 최초 ‘불교사전’ 편찬으로 빛을 발한다. 1964년에는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을 설립해 초대 원장을 맡는다. 해인사 판전에 보관한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본부 일이다.

이후 37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1년 318권으로 된 한글대장경을 완역했다. 이제는 전산 시스템으로 쉽게 만나는 한글대장경 탄생은 말 그대로 스님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뜻이다. 대부분 한자로 편액한 ‘대웅전’이 봉선사에는 ‘큰법당’이라고 쓴 까닭이기도 하다.

봉선사 주지를 다섯 번 역임한 월초 스님.
봉선사 주지를 다섯 번 역임한 월초 스님.

# 향성 스님이 바라본 운허 스님 발자취

월초 스님은 1934년 열반하시기 전 유촉을 남기는데, 2가지 큰 결단을 내린다. 자신의 전 재산을 봉선사에 헌납해 선원과 강원을 지으라는 주문이었다. 둘 다 하기 어려우면 강원을 설립하라고 하셔서 ‘봉선홍법강원’이 탄생했다. 

그러면서 또 2가지 당부를 남기시는데, 자신의 손주 상자(제자) 둘에 관한 내용이었다. 모두 독립운동을 했는데 태허(운암)는 만주에 가더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도 없으니, 만약 죽었거든 유족들에게 제사라도 지내라고 ‘11만2천400여㎡’에 이르는 토지를 남긴다. 

운허 스님은 독립운동가와 스님을 반복하니 이제는 독립운동보다는 승려와 후손을 위해 교육에 힘쓰라며 토지를 내린다. 전 재산을 헌납한 사실도 그렇지만, 제자들의 독립운동을 끝까지 지지하고 그 자손까지 염려했다는 점에서 큰 울림을 준다.

운허 스님이 설립한 광한당은 독립자금을 모아 무기를 사서 중국에서 일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21년 귀국한 까닭도 군자금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송강(松江) 이호원 선생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분들과 만나기 전 장소가 발각돼 대다수가 체포되고 만다. 이를 알고 운허 스님은 피신을 하는데, 그 과정을 보면 재미있는 일화가 등장한다. 당시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셨는데, 안쪽이 흰색이었다고 한다. 일본 경찰들이 검은 두루마기를 체포하려고 들이닥치니 운허 스님은 뒤집어 입고 변장을 하고 경성을 탈출하셨다. 

운허 스님은 함자가 참 많다. 처음 독립운동 당시엔 ‘이시열’이라는 가명을, 경성에서 탈출할 때는 ‘박용하’라는 가명을 쓰셨다. 살벌한 경계의 시대에 나라 독립을 위해 치밀하게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엿보게 된다.

탈출한 뒤 은거하신 봉일사에서 경송 은천(慶松) 스님을 만나 은사로 모시며 출가하는데, 이분이 월초 스님의 제자였다. 1922년 봉선사로 돌아와 월초 스님께 배운다.

여기에서 월초 스님의 대담함을 엿볼 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박한영 스님께 공부를 하러 가니 정원이 차서 학인(학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월초 스님이 사재를 들여 박한영 스님을 개운사로 모셔다 대원암 옆에 크게 강원(교육기관)을 짓는다. 불교와 나라를 이끌 인재라면 전부를 헌신한 분이 월초 스님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독립투사로 만주 일대를 누빈 운허 스님.
독립투사로 만주 일대를 누빈 운허 스님.

운허 스님이 조직한 학인연맹은 오늘날 전국대학생연합 같은 조직이다. 청담 스님부터 조정래 작가 아버지 종현(宗玄) 스님까지 많은 스님들이 동참했다.

하지만 일본 탄압으로 위험에 처하자 1929년 다시 만주로 독립운동에 나선다. 조선혁명당에선 ‘선전부장’을 맡기도 하고, 한중연합독립운동 결사체에서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까지 한다.

직접 전투에 참여할 만큼 나라 독립에 ‘진심’이었던 운허 스님은 해방 이후 계몽·개혁으로 시선을 돌린다. 

해방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하지만 전 재산을 내놓으니 생활이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교육환경은 열악했고, 독립투사의 애국정신 맥도 이어야 했다. 그렇게 1946년 탄생한 학교가 ‘광동학교’다. ‘해방한 조국의 새로운 2세를 교육해야만 우리 민족이 힘차게 도약한다’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봉선사 큰법당 내부 벽에 봉안한 한글 화엄경판.
봉선사 큰법당 내부 벽에 봉안한 한글 화엄경판.

광동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지만 한국전쟁을 피하지 못하면서 운허 스님은 극심한 고초를 겪는다. 해방 이후 조선혁명당을 재건해 잠시 정당활동을 했던 부분이 좋지 않게 작용한 듯싶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라를 사랑한 운허 스님을 떠올리면서 현재 대한민국 평화에 크게 이바지했음에 다시 한번 감사할 따름이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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