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환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손민환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1941년 부평에 설립된 인천육군조병창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육군의 병기 제조 공장이다. 군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분단 국가의 현실상 육군이 어떤 임무를 하고 어떤 무기가 필요한지 대략적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개창 당시 인천육군조병창의 초기 생산품은 소총, 경기관총·중기관총, 총검, 군도 등으로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육군에서 사용할 법한 무기류였다.

인천육군조병창에서는 제1제조소인 부평 그리고 제2제조소인 평양병기제조소에서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한편, 인근 하청공장을 통해 납품받기도 했다. 인천육군조병창의 하청공장 중 하나가 조선기계제작소(현재 HD현대인프라코어)다.

1937년 6월 일본 종합기계 제작 회사인 요코하마공업소가 직접 진출하는 형식으로 만석정(현재 동구 만석동)에 조선기계제작소가 설립됐다. 인천의 군수 기지화가 구체화될 무렵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기계제작소를 인천 중공업을 발흥할 삼대 공장이라 소개했다.

1938년 중일전쟁 장기화로 자본금을 이례적으로 6배 증자한 조선기계제작소는 1939년 들어 화수정(현재 동구 화수동)까지 부지를 확장하고 인천부 매립지에 공장 증설을 시작했다. 전시 통제 경제의 기자재 조달난 속에 공사가 지연됐으나 1942년 성대한 낙성식이 거행됐다.

하지만 공장 확장과 반대로 시장 상황은 급변해 조선기계제작소가 주력으로 제작하던 광산용 기계 수요가 급감했다. 결국 조선기계제작소는 광산용 기계에서 선박용 기계 제작으로 눈을 돌린다. 때마침 1943년 일본 육군에서 ‘마루유’라는 이름의 잠수정 건조 계획을 수립하고, 조선기계제작소를 건조 기업 중 하나로 지정했다.

육군의 잠수정 제작이라는 상식 밖 결정에는 일본 육군이 독자적으로 잠수정을 만들어야 했던 시대 배경이 있었다.

1942년 일본 해군 수송함이 미 연합군 공격으로 침몰되자 해군 조병창에서는 새 수송함을 건조하기 위해 일본 육군에 잠수정을 보급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이에 일본 육군은 자체적으로 운송용 잠수정 건조 계획을 추진했다. 1943년 독일에서 개발한 수송용 잠수정 도면을 참고해 기본 설계도를 만들고 잠수정 건조 업체를 물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조선기계제작소였다. 일본 육군이 잠수정 건조 가능 여부를 타진하자 조선기계제작소는 설계 도면만 있으면 건조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1943년 4월, 일본 육군에서 조선기계제작소에 잠수정 건조 명령을 하달했다. 계획 수행을 위한 명령 계통은 육군병기행정본부(마루유위원회)→인천육군조병창→조선기계제작소였다.

인천육군조병창이 조선기계제작소에 정식 발주한 것은 1944년이 돼서였다. 매월 마루유 10척을 건조해 연간 120척을 납품하는 것이었다. 오사카조병창에서 함체와 화포를, 도쿄조병창에서 광학 병기와 음향 장비를, 사가미조병창에서 엔진 등 기관을 각각 생산하고 조선기계제작소에서 다른 부분을 만들어 완성품을 제작하는 형식이었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조선기계제작소의 잠수정 건조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이후 미군은 인천항 일대를 조사하며 도크에 남은 잠수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한국전쟁 때까지도 잠수정은 그대로 남아 향토사진가가 찍은 사진도 전한다. 현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부평역사박물관, 화도진도서관 등에서 관련 사진을 소장 중이다.

광복 이후 조선기계제작소는 한국기계공업㈜, 대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현대두산인프라코어㈜, HD현대인프라코어㈜로 명칭이 바뀌었다. 사명이 바뀌는 동안에도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사용하던 잠수정 도면은 그대로 보관된 듯싶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이 도면을 실제로 봤다는 직원들이 있었다. 비록 일본에 마루유와 동일한 도면이 남았지만, 조선기계제작소에 전해진 도면이 실물로 공개된다면 인천 지역사에 의미가 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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