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취재를 시작할 무렵 상당히 생소하게 느낀 문화가 있었다. 하위직 직원들이 순번을 정해 간부공무원과 점심을 같이 먹는 관행이다.

‘0월 과장님 오찬 지정’, ‘0월 식사 지킴이’처럼 표현은 달랐지만 부서를 막론하고 다수 사무실에 당번표가 붙었다. 그 중 일부 간부공무원은 직원들이 다달이 갹출하는 식비에 무임승차해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당시 민원을 듣고 취재를 시작한 기자는 또 한 번 놀랐다. 정작 많은 당사자들이 이 문화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돈을 쓰지 않는 간부에게 불만을 가지긴 해도 점심 당번 자체는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간부와 직원 간 소통이 목적이라는 이유까지는 공감했다. 그렇다 해도 ‘간부가 함께 밥 먹을 사람을 구하지 못해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배려에는 입이 떡 벌어졌다.

결국 이 같은 문화는 시간이 지나며 차츰 자취를 감췄다. 일부 흔적이 남은 곳도 있지만 비용 부담 방식은 번갈아 가며 사거나 각자 부담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간부공무원과 밥을 먹는 날 자체가 아예 없어진 기관도 적지 않다. 시대가 변한 탓도 있겠지만 일부 직원들이 꾸준히 부당함을 주장한 덕분이라 생각한다.

최근 한 시민에게 받은 사진 한 장을 보고 문득 철 지난 점심 당번제가 떠올랐다. 기자가 받은 사진은 올해 초 옹진군이 튀르키예 대지진 관련 성금을 모금하며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이다. 메일에는 ‘팀장 2만 원’, ‘직원 1만 원’이라는 금액과 입금 계좌번호를 적었다.

제보자는 "요즘 세상에 금액까지 정해 모금을 강요했다"며 황당해했다. 공무원이 아닌 시민 여럿에게 물어봐도 비슷한 의견이 모였다. 

이번에도 공무원들 반응만 달랐다. 옹진군은 "예시로 금액을 적었을 뿐 모금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 모금을 한 기초단체 몇 곳을 더 조사했다. 옹진군처럼 금액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동(洞) 단위에서 자체 기준을 정하기도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직원들이 얼마를 낼지 고민하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방식이 모금을 강제하는 듯 비친다는 인식은 희박했다.

일반 기업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들이 공직사회에서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식사 당번제가 그랬듯 이런 방식의 모금 관행도 차츰 바뀌지 않을까 싶다. 문제의 사진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내부 직원들에게만 보낸 해당 메일은 한 직원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리면서 알려졌다.

게시물은 금세 내렸지만 메시지는 명확하다. "부당하다"는 항변이다. 이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는 공무원들도 적게나마 확인했다. 관행에 균열이 갔다. 변화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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