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시사회서비스원장
황흥구 인천시사회서비스원장

곧 모내기철이다. 

쌀 생산량이 늘어나는 게 문제가 될 줄이야. 급기야 양곡관리법 개정으로 쌀값이 떨어지거나 생산량이 늘어날 경우 정부가 전부 사 주란다. 창고에 재고가 쌓여 넘쳐 나는데 어떻게 매입하느냐며 항변하자 그럼 밥 한 공기를 다 먹자는 운동을 벌이자고 하니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아우성이다.

그렇다면 쌀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건 어떨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정책이지만 이게 통했던 시절이 있었다.

1976년 시청에서 근무하다 당시 ‘북구 부개동사무소’에 발령을 받았다. 지금은 도시개발사업으로 온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때는 거의 다 논과 밭이 전부인 농촌마을이었다. 발령을 받자마자 ‘산업계’를 맡았다. 산업계라는 게 농사 담당으로서 매일 논밭에서 살아야만 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부터 농촌에서는 쌀 증산이 제일의 국정과제가 됐고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 심기를 권장했다. 말이 권장이지 그때는 모두 목표량을 설정해서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담당자는 물론이려니와 동장도 그만둘 각오를 해야 했던 때다.

통일벼는 일반 벼품종인 ‘아끼바레’보다 소출은 많이 나지만 밥맛이 떨어지고 병충해에 약해 농민들이 심기를 기피했다. 그러나 쌀 증산이 지상 과제인데 통일벼를 심지 않으면 큰 죄라도 진 듯 울며 겨자 먹기로 심던 때였다. 

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 담당자는 물론 농촌지도소, 농협 직원들을 동원해 비닐 보온못자리를 수시로 조사하고 만일 통일벼를 심지 않았으면 못자리를 짓뭉개가며 다시 통일벼를 심게 했다. 모판을 뒤집어엎는 건 시초에 불과하고, 모내기와 가을 추곡수매까지 끝내야 목표량이 달성된다.

그해 여름에는 가뭄이 계속됐다. 그때는 대개 천수답으로 비가 오지 않으면 모내기를 할 수 없는 실정으로, 가장 교통량이 많은 경인국도가 대단지 논 가운데를 관통했다. 국도변에는 반드시 모를 내야 한다며 구청에서 매일 나와 모내기를 독려했다. 

방법을 궁리하다 지금 부개동 ‘제3군지사’ 부대 안에 큰 저수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동장님과 부대에 들어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저수지 물을 퍼서 논에 물을 대기로 했다. 양수기로 물을 퍼 올리느라 밤을 새우기도 하고, 관외인 ‘송내수리조합’ 물을 끌어대느라 아예 논두렁에 천막을 쳐 놓고 몇 날 며칠을 집에도 못 들어갔다.

이렇게 고생해 가며 모내기를 끝냈어도 가을 추곡수매 때 수매 목표량을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 늦은 모내기와 고르지 못한 일기 탓으로 목표량을 채우기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동장님이 변통한 돈으로 김포에서 통일벼를 사다가 채워 넣어야 했다. 

높은 등급을 받으려면 건조가 우선이었다. 트럭에 가득 담긴 통일벼 포대를 차례차례 뜯어서 ‘제3군지사’ 정문 앞 아스팔트길에 말렸다. 며칠 잘 말린 벼를 하루만 더 말리려고 했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전 직원이 동원돼 급히 쓸어 담았지만 그동안 고생한 보람도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다시 말리고 쓸어 담고 하다 보니 허실되는 양이 만만치 않았다. 손해를 보는 줄 알지만 목표량은 달성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쌀 증산 정책과 함께 쌀 소비 억제에도 당시 공무원들이 앞장섰다. 지금은 남는 쌀을 조금이라도 더 소비하기 위해 밥 한 공기를 다 먹자는 캠페인을 벌이자고 했다가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그때는 소비를 줄이기 위해 ‘절미운동’과 ‘혼·분식 장려’를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했다.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대에 절미운동이나 혼·분식 장려도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시작했으나 계몽에 머물지 않고 단속을 통해 강제성을 띠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강력한 정책이 없었다면 쌀의 자급자족은 요원했을 터다.

지금은 보릿고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풍요롭기 그지없는 사회에 산다. 한 톨이라도 더 생산량을 늘려 보자는 통일벼를 권장하고 쌀 소비를 줄여 보기 위해 혼·분식을 강제하던 시절이 불과 40~50년 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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