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 자주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해 식민지배를 위한 정책 기반을 구축하는 교육 정책을 도입한다. 침략을 정당한 양 꾸미고, 조선인의 저항을 누르기 위한 ‘민족 말살 정책’의 시작이다. 

일본은 학제를 전면 개편하고 교육 내용을 바꾼다. 교과서 검정 규정으로 조선의 나라를 사랑하는 교육 내용을 봉쇄하고 민족 저항의식 바탕을 파괴하려고 한다. 하지만 조선 교육계는 이에 굽히지 않고 오히려 국권 회복의 필수 조건으로 교육을 주창한다.

다행히 지방 유지를 중심으로 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육으로 국민을 각성하려는 선구자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이런 사학 운동의 한가운데 남양주가 있었다.

정규영 부자가 교장을 역임한 광동학교가 있었던 남양주 조안면 삼태기마을 전경.
정규영 부자가 교장을 역임한 광동학교가 있었던 남양주 조안면 삼태기마을 전경.

# 남양주 향학 전통을 잇다

남양주는 늘 새로운 시대에 대비했다.

정약용 선생은 평생 자신이 태어나서 산 열수(洌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사람은 자신이 나고 사는 산수를 닮는다"고 했다.

남양주는 한양과 가까워 선진 문물을 쉽고 빠르게 수용해 조선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열린 학문 태도로 다방면의 학술 발전을 꾀하는 데 중심 구실을 했다.

구태를 벗고 새로운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애썼고, 진실한 눈으로 일상에서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 현재를 바로 보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과 함께 자기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참다운 삶의 길을 생각했다. 천 번을 궁리해 새로운 자기를 개척하려고 했고, ‘실용에 힘쓰라(實用是務)’는 가르침을 교육 정신으로 남겼다.

사대부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지위를 얻지 못한 중인(中人)으로 학문하는 자유와 신분 문제의 해결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나서는 사람도 없던 1851년 화접리(현 별내동)의 현일(玄鎰·1807~1876)이 중심이 돼 벌인 ‘인재 등용의 차별을 철폐하라’는 운동이 대표 격이다. 전통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외부에서 변화를 수용하고 자신의 주체 활동으로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처럼 남양주 교육의 중심 사상은 신분의 한계를 깨고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구국의 인재를 육성했다. ‘현일’처럼 신분 해방운동을 전개하고 ‘현채’처럼 새로운 인재 육성을 위한 교재를 편찬하기도 했다.

‘여운형’처럼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고 국가 위기를 극복하려고 학교를 세워 인재를 교육했다. 문무를 겸비하고 주경야독을 실천하며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헌신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토대가 된 지역이 바로 남양주다.

정약용의 후손인 정향진은 부친 정규영과 함께 초부면 광동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사진은 그의 원고.
정약용의 후손인 정향진은 부친 정규영과 함께 초부면 광동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사진은 그의 원고.

# 남양주, 사학 운동의 중심에 서다

1906년 1월 하도면(현 남양주시 평내·호평)에 정인호(鄭寅琥) 들이 세운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시작으로 사학을 설립한다. 

1907년에는 전 양주군수 홍태윤(洪泰潤)이 교장을 맡은 일성학교(一成學校), 금촌면(현 양정동)에 봉명의숙(鳳鳴義塾), 진관면(현 진건읍)에 동진관서숙을 세웠다.

1908년에는 상도면(현 화도읍)에 기인학교(基仁學校)와 가오실노동야학교, 초부면(현 조안면)에 광동학교(廣東學校)와 대동기독청년소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남양주 주재 일본 헌병과 보조원은 시민에게 행패를 부리고 구타와 갈취를 일삼았다. 별비면(현 별내면)과 철마산 부근에선 의병과 일본군의 교전이 벌어졌고, 퇴계원에서도 교전이 빈번해 시민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때였다.

하지만 남양주 사학의 열기는 오히려 거세졌다. 1909년에는 접동면(현 진접읍)에 궐리학교(闕里學校), 건천면(현 진건읍)에 명진학교(明進學校), 한동학교(漢東學校), 별비면(현 퇴계원읍)에 성륜학교, 기독경인학교(基督儆仁學校)를 세웠다.

별비면(현 별내면)에 광문학교와 신학문학교를 설립했고, 진벌면(현 진접읍)에 신창학교(新昌學校), 미음면(현 다산동)에 미음야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다.

이 밖에 정약용의 후손인 정규영·정향진 부자가 교장을 역임한 광동학교가 초부면에, 평구(현 양정동)에 평구사립보통학교가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명진학교 기부금 모집 광고, 별비면 남명희 신학문학교를 소개한 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명진학교 기부금 모집 광고, 별비면 남명희 신학문학교를 소개한 글.

# 주민 기부가 사학 바탕

남양주 사학은 설립자 취지와 의지, 여기에 주민 기부가 큰 구실을 했다.

봉명의숙은 조중응·구연팔 들이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고도 초기 경비가 부족해 교사 초빙에 어려움을 겪었다. 발기인들이 돌아가며 학생을 가르치고 장사를 하거나 품을 팔아 모금한 돈으로 교사를 고용하기도 했다.

한동학교는 교실이 비좁았는데, 서정현이 선산 나무 500그루를 기증해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가오실(嘉梧室) 야학에는 피우던 담뱃대를 팔아 기부하는 주민처럼 수많은 사람이 기부했다.

광동학교는 대한제국 초대 법률기초위원을 지낸 신좌영(申佐永)이 발전기금을 기부해 ‘기흥학회보’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남양주 사학 운동은 자주 국권을 회복하고 문명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었다. 시 전역에 고르게 분포한 남양주 사학 운동은 지역민의 교육열과 향학열 상징이다.

# 남양주 근대 사학의 주인공 

남양주 근대 사학을 이끈 인물로 일성학교 교장 홍태윤(洪泰潤)을 꼽는다. 경기도 양주 출생으로 남양홍씨다. 포천현감, 양평군수, 양근현감을 거쳐 양주목사를 지냈다. 중인 출신이나 인품이 훌륭하고 겸손해 현감으로 있을 때 마을 어른이나 친족, 친구들을 만나면 수레에서 내려 깍듯이 인사했다.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明聖皇后)를 업고 경기도 여주까지 피신시킨 이후 발탁됐다. 

영평군수(永平郡守) 시절에는 6년 동안 관직을 맡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혹시 영평을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동학교 교사 구연태(具然泰)는 1909년 7월 25일 건천면(乾川面) 양지리(楊地里)에 이수악(李秀岳)·심원익(沈遠翼)과 함께 임원으로서 한동학교를 세운 중심 인물이다.

당시 한동학교는 유용하(劉鏞河)·홍은섭(洪恩燮)·이창식(李昌植) 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교육해 먼 지방에서 유숙하며 공부하는 학생이 많았다.(「기호흥학회월보」 ‘제12호’ 참조).

1910년 1월 경찰 복장에 칼을 차고 쌍안경을 휴대하고 각자 화승총을 들고 탄환 수십 발을 휴대한 폭도(暴徒)들이 구연태 집에 들어갔다. 의병장 이은찬 부하 강기동(姜基東) 일행이었다.

강기동은 "충심을 다하고 힘을 모아 옳은 일을 하는 데 돕기를 바란다(盡忠竭力 以助救義)"는 주문을 했는데, 이들은 아마도 당시 건천면장이던 구연태가 앞서 1899년 대한제국 무관학교 주사(主事)였기 때문에 군자금을 모금하려고 방문했다고 판단된다.

함께 한동학교를 세운 심원익은 가주서(假注書), 삼사문(三事門) 겸 동벽사성(東壁蛇城)을 거쳐 1890년(고종 27년)에 수찬(修撰)·교리(校理)로 제수됐다.

1892년에는 사은동지사(謝恩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갈 때 고종황제가 청(淸)과 각 나라의 형편을 자세히 염탐하라고 명해 이를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승정원비서승(承政院秘書丞)을 거쳐 좌통례(左通禮)에 이르렀다.

평탄한 관직 생활이 가능했으나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나라를 걱정하며 귀향했고, 일제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광복 1년 전에 숨졌다.

김형섭 남양주시 문화예술과 다산정약용팀장.
김형섭 남양주시 문화예술과 다산정약용팀장.

# 남양주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향학열

1910년 이후 남양주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은 결국 1906년부터 시작한 사립학교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국권 상실을 개탄한 지역 지식인들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 이석영은 중국으로 망명해 경학사를 세워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육성해 독립운동 초석을 이뤘다.

김성암은 1919년 변혁을 목적으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반포하고 조선독립단을 구성해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려고 결정하는 모양이니,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소요를 영속시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평내 이승익은 "2천만 동포가 조선 독립을 기뻐해 만세를 부름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저항했다. 남양주에 터 잡고 살면서 면면히 내려온 선현들의 학문 교육 정신과 문명 의식을 실천한 선조들을 떠올리며 감사와 감동으로 고개가 숙여지는 까닭이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도움 주신 분=김형섭 남양주시 문화예술과 다산정약용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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