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색뉴지엄 기획전시실에서 콘크리트 벽 배경으로 전시되는 미디어 작품.
고색뉴지엄 기획전시실에서 콘크리트 벽 배경으로 전시되는 미디어 작품.

모든 건축물에는 목적이 있다. 주택은 사는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데 원하는 조건을 갖추고, 학교는 교육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짓는다.

공공기관과 업무 공간, 상업시설도 저마다 각자의 목적을 두고 짓는다. 그래서 목적을 상실한 건축물은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해 쇠락하기 쉽다.

하지만 원래 형태를 살려 새로운 목적을 부여하는 ‘재활용’은 더 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수원시가 건축자산을 재활용한 고색뉴지엄 이야기가 대표 격이다.

배관이 그대로 남아있는 고색뉴지엄 지하 복도. 벽에 어린이들의 작품을 설치했다.
배관이 그대로 남아있는 고색뉴지엄 지하 복도. 벽에 어린이들의 작품을 설치했다.

# 평범한 외관, 비범한 내부 ‘반전 매력’

고색뉴지엄은 권선구 산업로 85에 자리잡았다. 주소에서 드러나듯 산업단지인 수원델타플렉스 안에 있다. 기업 건물이 즐비한 곳이지만 생태하천으로 관리하는 황구지천도 바로 옆에 있어 전원 같은 느낌이 공존한다.

외관은 네모반듯한 형태로, 이 일대에 자리잡은 건물들과 비슷하다. 다만, 가장자리를 커다란 철제 구조물로 둘렀고, 한쪽 옆면이 유리창으로 돼 언뜻 카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외관의 평범함과 달리 입구로 들어서면 내부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작은 휴게실처럼 마련한 공간에 수원 산업 역사를 보여 주는 전시 자료를 배치해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농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성장한 수원이 1960년대 섬유산업, 1970년대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2000년대부터는 IT와 바이오 같은 기술집약형 산업 중심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알려 준다.

입구 오른편은 지하로 연결되는데, 계단 옆 벽면을 유리창으로 마감해 햇빛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덕분에 지하지만 지하 같지 않은 자연스럽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긴다.

계단 밑에 작은 공간은 아카이브홀이다. 수원과 관련한 책이나 자료, 방문객이 관심을 가질 만한 스테디셀러를 비치한 작은 서재다.

지하 전시홀에 있는 약품 탱크.
지하 전시홀에 있는 약품 탱크.

눈을 돌리면 고색뉴지엄만의 정체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시홀에는 커다란 탱크 두 개가 남았고, 긴 복도에는 거친 콘크리트 벽면과 배관이 그대로 노출됐다.

사용감이 없는 약품 탱크 겉면에는 고색동에 대한 이야기를 새겨 방문자들에게 이 터의 뜻을 전한다. 복도는 배관이 계속 이어져 공장 느낌의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가 따로 없다.

메인 공간인 기획전시실은 1층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다. 지하지만 전시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한가운데 천장 한 부분에 창을 만들어 자연채광이 가능하고, 회색 벽은 일반 전시 공간과는 다른 특별한 느낌을 만든다.

기둥과 벽 들 곳곳에 독특한 구조를 살려 공간 자체를 오브제로 만들었다. 입구 왼편에는 폐수 찌꺼기와 이물질을 걸러내는 ‘협잡물 종합처리기’를 그대로 둬 이 공간의 정체성을 상기시킨다.

1~2층에서 운영 중인 어린이집 내부. 층고에 변화를 줘 흥미롭게 구성했다.
1~2층에서 운영 중인 어린이집 내부. 층고에 변화를 줘 흥미롭게 구성했다.

# 비운의 산업건축물,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

고색뉴지엄의 과거는 마치 연극 같다. 본래 건축한 목적으로는 단 한번도 사용하지 못했던 비운의 건물을 수원시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예술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스토리를 품었기 때문이다.

원래 고색뉴지엄은 폐수처리장이었다. 수원시 산업단지인 수원델타플렉스에 입주한 기업에서 발생하는 폐수를 처리하려고 만들었다. 3차에 걸쳐 조성한 수원델타플렉스 삼각형 왼쪽 꼭짓점에 자리를 잡고 산업단지 조성 초기인 2005년 준공했다. 하루에 1천380t에 이르는 폐수를 처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폐수처리장은 태어나자마자 쓸모가 없어졌다. 수원델타플렉스에 전기·전자·IT·BT 같은 첨단기업이 주로 입주하면서 가동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폐수가 발생하지 않는 산업단지 폐수처리장은 존재가 희미해진 채 10여 년간 델타플렉스를 중심으로 한 수원 산업 발전을 쓸쓸하게 지켜봤다.

방치한 새 폐수처리장 운명이 바뀐 시기는 2015년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국·도비를 투입해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기능을 잃고 방치한 공간을 산 공간으로 다시 바꾸는 작업이었다.

기획전시실 내부에 남아있는 존치시설과 함께 작품이 전시된 공간에 방문한 관람객들.
기획전시실 내부에 남아있는 존치시설과 함께 작품이 전시된 공간에 방문한 관람객들.

리모델링은 원래 있던 공간을 존치해 역사성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고 진행했다. 폐수처리장이던 공간의 느낌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배관과 기계장치, 약품 탱크 따위 시설을 그대로 뒀다.

더구나 폐수처리시설 중 가장 큰 공간이던 공동구 연계 유량 조정조와 유량 분리조에서 복잡하게 얽혔던 설비를 해체하고 기둥만 살렸다. 공간 전체를 그대로 펼쳐 다양한 전시 구상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1년여간 리모델링을 거쳐 2017년 11월 폐수처리장은 고색뉴지엄으로 변신한 모습을 드러냈다. 지역 이름인 ‘고색’과 새롭다는 뜻의 ‘뉴(New)’,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뜻하는 ‘뮤지엄(museum)’을 합성해 만든 이름과 함께였다.

# 복합 전시 공간과 어린이집, 시민에 열린 공간

현재 고색뉴지엄은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공간을 활용 중이다. 1층과 2층 일부를 시립어린이집으로, 1층 일부와 지하층은 복합전시문화공간으로 쓴다.

복합전시문화공간은 시민에게 개방했다. 개관 기획전시 ‘Re-Bone(리본) 묶는 기술’이 시작이었다. 폐수처리장이 문화의 장으로 변모하고 산단과 지역, 예술을 묶는 과정을 알리는 첫 시도였다.

수원시 권선구에 위치한 고색뉴지엄.
수원시 권선구에 위치한 고색뉴지엄.

이후로는 수원 예술인들이 전시하는 어엿한 대관 전시를 진행했다. 사진·회화·미디어·설치미술·시화와 그 밖에 다양한 장르의 전시가 60여 건 가까이 공간을 채웠다.

최근 대관 전시는 인근 지역 미술학원에서 작품활동을 진행한 어린이 100명이 공동 작품 14점을 전시해 알록달록한 어린이 작품이 회색 벽에서 한층 더 빛나게 했다.

교육과 문화 행사도 활발하게 열었다. 지역 초등학생, 경로당, 가족과 일반 시민은 물론 산업단지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 행사 ‘고색데이’가 수원델타플렉스와 시민의 상생 기회를 만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재즈·클래식·국악·연극·마술 같은 다양한 장르를 즐기는 문화 행사도 해마다 열면서 고색뉴지엄이 주민들의 문화예술 갈증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줬다.

1~2층에 마련한 시립고색뉴지엄어린이집 덕분에 고색뉴지엄에는 어린이 에너지가 가득하다. 어린이집 시설은 넓은 놀이 공간이 눈길을 끈다. 원래 공간을 리모델링하며 아이들에 맞춰 높낮이에 변화를 줘 흥미를 유발하고, 계단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 안전을 더했다. 인근 자연환경을 활용해 생태활동 중심으로 친환경 교육 여건까지 갖춰 고색뉴지엄에 활기를 더한다.

이렇게 방치한 폐수처리장에서 생활문화 공간으로 변신한 고색뉴지엄은 다양한 국내외 단체의 관심을 받는다.

영국 비영리단체인 더 그린 오가니제이션이 전 세계 친환경 우수 사례를 시상하는 ‘그린월드 어워즈 2018’에서 수상작으로 선정했고, 학교 공간 혁신 인사이트 투어 코스 중 일부로 선정해 교육기관 관계자 방문과 벤치마킹도 이어진다.

고색뉴지엄에서 대관 전시를 관람한 시민은 "가까운 곳에 누구나 작품을 전시하는 열린 공간이 있어 좋다"며 "일반 전시관과 다른 콘크리트 벽과 기계가 독특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안경환 기자 jing@kihoilbo.co.kr

사진=<수원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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