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뀔 때마다 공기 내음이 달라져서 좋다. 올 여름은 정확히 석가탄신일 연휴가 끝나고 시작했다. 출근길 여름 내음이 훅 났기 때문이다. 초여름은 풀 내음이랑 어슷비슷하다. 그러다 날씨가 후덥지근해지고 비가 좀 더 내리면 젖은 흙 내음에 가까워진다.

제대로 각인한 시기는 대학교 1학년 때다. 첫 학기가 끝난 6월, 종강과 맞추기라도 한 듯 비가 끊임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처음 맞는 방학에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하릴없이 도서관 영화감상실에 드나들었다.

도서관에 가려면 기숙사에서 나와 작은 연못을 지나쳐야 했다. 비가 내리니 연못 부근엔 온통 진흙 내음이 진동했다. 그해 장맛비는 유난히 습했고 늘어졌다. 우산을 써도 발은 물론이고 종아리까지 젖었다. 들고 다닌 가방은 가죽 소재였는데 선물 받아 아끼는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도서관에 도착하면 빗물을 제대로 털어내지도 않고 우산을 그대로 가방에 넣었다. 얼마 안 가 가방은 망가졌다. 그렇게 물비린내를 풍기며 영화를 보다가 기숙사로 돌아갔다.

영화에서도 비는 분위기를 돋울 때 자주 쓰는 장치다. 빗줄기가 배경을 덮으니 관객 시선은 한곳에 모인다. 자연스레 인물의 감정과 대화에 주목할 도리밖에 없다. 대사가 없는 고요한 장면이라도 빗소리 하나로 긴장감을 유발한다. 연극 같은 상황을 만들 때 유용하다.

기자는 반대로 비 때문에 긴장을 해소하는 느낌이 좋다. 예전에 봤던 한 단편영화가 그렇다. 그 영화는 조금 전 설명과는 반대로 뜨겁게 내리쬐는 한여름 햇볕이 배경을 덮는다. 찜통 같은 더위만큼 등장인물 사이에서 숨 막히는 갈등이 쌓이다 결말에서 풀린다. 마지막 장면은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장식한다. 그래서 더 연극 같다. 그 뒤로 여름이 되면 미처 해소하지 못한 감정들을 떠올리곤 한다. 비가 내리면 같이 씻겨 가길 바라면서.

아무튼 그해 도서관에서 봤던 영화들을 이제는 거의 까먹었다. 반면 나머지는 선명하다. 연못을 지나가며 맡았던 여름 내음과 우산을 뚫을 기세로 쏟아졌던 굵은 빗소리, 텅 빈 영화감상실을 둘러싼 적막. 방학 동안 심심했던 기자가 대화할 길이 덮이니(?) 반대로 주위 배경이 살아난 셈이다. 어쨌건 연극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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