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라는 자유로움 속에서 숨 쉬는 원동력은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선조들이다.

남양주의 경우 해병대 활약에 힘입어 북한강지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포탄 속에서 승리를 쟁취한 해병대의 고귀함이라 하겠다.

북한강지구 전투는 서울 탈환 작전의 한 가지로, 수도권을 완전히 확보하려고 1950년 10월 1일부터 7일까지 망우리고개부터 경춘가도인 북한강까지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적들이 경춘가도를 따라 철원 방면으로 철수하면서 기회만 포착하면 어느 한 군데를 다시 침공했기 때문이다.

경춘국도 장악이 급선무인 상황에서 우리 해병대가 북한강까지 진출해 퇴각하는 적을 격퇴하며 수도권 치안을 확보했다. 치열하고 숨막혔던 그날의 기록을 시간대별로 알아본다.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문.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문.

# 민주주의를 위한 사투 ‘서울 탈환 작전’

한국전쟁 최대 전환점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은 제10군단 공격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가 1950년 9월 15일 감행했다.

미 해병상륙단이 저항하는 적을 무찌르고 인천 동쪽 외곽에 설정한 교두보로 진격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에 남은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맡았다.

교두보를 확보한 상륙군은 곧이어 서울 탈환 작전에 들어간다. 미 해병 제1연대는 경인(京仁)가도 우측을, 미 해병 제5연대는 동·좌측을 각각 담당하고 서울로 진격한다.

한국 해병대는 16일 저녁 제2대대를 인천시내 잔적 섬멸 작전에 투입하고 자리를 옮겨 미 해병 제5대대 좌측에 포진한다. 17일 수차례에 걸쳐 적 역습을 물리치면서 김포반도에 남은 적을 섬멸했다.

미 해병 제1연대는 18일 소사(素砂)를 탈환한 뒤 영등포로 향한다.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해병 제1·2연대는 행주(幸州) 쪽으로 한강을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고 19일 준비에 들어갔지만 이를 알게 된 적의 반격으로 실패한다.

20일 도하를 강행해 능곡에서 수색 방향으로 적을 압박했다. 17일 뒤늦게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미 제1연대의 남쪽을 차단하고 엄호한다.

미 해병 제1연대는 영등포로 진격을 계속하고 격전을 거듭했다. 서울 서측방을 공격하기 시작한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 해병대는 죽기살기로 임하는 북한군 저항에 부딪쳐 연희고지(延禧高地) 일대 능선에서 격전이 이어지면서 전진 속도가 느려졌다.

하지만 아군의 선전으로 적의 보루는 무너지고, 24일 연희고지 능선을 점령했다. 서울을 공략하는 주력 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울 서측방에서 25일까지 능선을 완벽히 확보했고, 일부 부대는 서울시에 진입했다.

북쪽은 미 해병 제7연대와 한국 해병 제5대대, 중앙은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 해병 제1대대였다. 이때 남쪽은 미 해병 제1연대와 한국 해병 제2대대를 배치해 반원 모양의 궁형(弓形) 태세를 형성한다.

25일 밤 미 보병 제32연대와 한국 육군 제17연대가 남산을 점령했을 때 공격을 개시한 한미 해병대는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했으나 적의 반격으로 전진이 불가했다.

한국 해병대는 27일 아침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고, 서울시에 남은 적을 완전히 섬멸했다. 이후 한국 해병대는 내륙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했다.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

# 완벽한 승리 ‘북한강 지구 전투’

9월 29일 0시를 기해 미 해병대 배속에서 원대 복귀한 한국 해병 제1·2대대는 옛 해군본부(전 원호청 자리)에 있는 사령부 통제 밑에 서울시 일원의 치안을 담당했다.

한국 해병대는 30일 미 해병사단작명으로 미 해병대와 함께 서울 방어를 위해 동쪽 지역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아 북한강 지역으로 출동했다. 이날 오후 3시부터는 작전을 위해 해군본부에서 망우리에 있는 사령부로 이동했다. 

10월 1일 오후 3시 의정부를 공격한 미 해병 제7연대에 배속됐던 제5대대도 원대 복귀했다.

한국 해병대는 단독 작전에 필요한 미 해병대 함포와 항공연락장교 65명이 해병대 사령부에 도착해 공격 준비를 서두른다. 신현준 대령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 제2·5대대 목표는 양수리와 한강, 북한강 교차지역, 마석우리(磨石偶里) 5㎞ 동쪽 경춘가도와 한강 연안을 따라 남으로 형성된 도로 일대에 있는 적을 섬멸하는 일이었다.

드디어 10월 2일 오전 8시 목표지역으로 전진한 해병대는 이곳에 진주한 미 7사단 1개 대대에게 지역을 넘겨받아 제5대대는 북쪽, 2대대는 남쪽에 배치돼 오전 10시부터 동시 공격을 감행한다.

공격대가 도농리(陶農里)와 인창리(仁倉里), 교문리(橋門里) 일대에 진출하자 도농리 남방 고지에서 적의 사격이 날아왔다. 갑작스럽게 1개 연대 병력과 충돌한 해병대는 즉시 적이 배치된 고지를 향해 공격을 시작해 격퇴했고, 오전 7시 제2대대가 가운리와 마신리를 점령한다.

제2대대 8중대가 고전하지만 좌측에 배치된 제5대대 박격포와 화력 지원으로 목표 고지를 무난히 점령했다. 적은 고지를 끝까지 지키려고 중요 포대와 기관총좌에 배치한 북한군을 쇠사슬로 묶어 최후까지 도망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이미 사기가 떨어진 북한군은 무너져 내려 일부만 겨우 도망갔다. 사살한 적만 200여 명, 포로가 50여 명에 이르는 성과였다. 아군도 16명이 전사하고, 63명이 부상을 입었을 만큼 전투는 치열했다.

# 완전한 승리와 점령

도주한 적은 아군에게 저항하려고 잔여 부대와 퇴계원리 동쪽 2㎞ 156고지(진관리)를 거점으로 배양리(培養里) 일대에 집결해 지면리(芝綿里) 113고지를 점령해 해병대 진격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해당 지역에 집중 포격을 가해 적을 강타함으로써 박격포 지원 속에 공격 중대가 113고지를 먼저 빼앗아 버린다. 

제2대대는 낮 12시 30분에 금곡을 우선 점령하고 계속 진출해 금곡 북방 700m 도로상에 매설한 적 지뢰를 제거하고 부근 일대 고지를 확보한 뒤 예비대로서 양정리에 자리를 옮겨 진지를 구축하고 경계에 임했다.

제1대대는 10월 2일 오전 9시 이태원을 출발해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해 오후 3시 금곡 남방 6㎞ ‘덕소’에 도착한다. 덕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4일 오전 8시 30분부터 북한강 연안을 따라 오후 5시 예봉산(禮峯山) 남동 6㎞에 있는 족자도 일대와 281고지(송촌리) 일대까지 진출했다.

10월 5일 오전 8시를 기해 제10군단 진출 예정선을 완전히 확보한 해병대는 임무를 마치고 다음 임무를 위해 인천으로 집결한다. 제2대대는 목포지구에서 새로운 잔적 섬멸 임무를, 제1대대는 묵호 방면에서, 제3·5대대는 원산에 상륙할 목적으로 각각 인천을 출항했다.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 제막식 날(1987.12.10) 찍은 해병대 의장대원 기념사진.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 제막식 날(1987.12.10) 찍은 해병대 의장대원 기념사진.

# 남양주에 새긴 해병대 기록

남양주시 양정동 산 73의 8엔 ‘해병대 북한강지역 전첩비’가 우뚝 섰다. 1958년 9월 28일 최초 건립한 뒤 1987년 12월 10일 현재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북한강지구 전투는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위해 경춘가도를 확보함으로써 38도선을 돌파하는 데 큰일을 했다. 비문에는 ‘9·28 수도 탈환은 나라 명맥을 유지하고 겨레의 멍에를 벗기고 역사의 광휘를 회복했고, 나아가 낙동강 전선 총반격의 기연을 지어냈다’고 적었다.

‘해병이 조국의 주석이요, 삼군의 정병’이라는 글귀도 남았다. 한국전쟁에서 큰 업적을 남긴 해병대 충혼이 존경받아 마땅한 까닭이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 <해병대 남양주시 전우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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