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운 인문공동체 책고집 공동대표
강태운 인문공동체 책고집 공동대표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시선을 묘사한 권여선의 단편 ‘실내화 한 켤레’에 나온 대목이다. 원시를 가진 주인공이 멀리 있는 행운은 잘 알아보는데 정작 자신 주변의 불행은 알아보지 못한다는 설정이 매력적이다.

바둑에서 대국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한 수씩 재현하는 과정을 복기라고 한다. 조직에서도 과제가 끝나면 복기를 한다. 처음부터 끝을 되짚어 가면서 성과와 반성을 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성과는 우리가 무엇을 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잘했던 것을 더 잘하게 하는 것이기에 비교적 수월하다.

반성은 알면서 놓친 것과 몰라서 놓친 것을 구별해서 살핀다. 몰라서 놓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는 몰라서 놓친 것이지만 다음부터는 알면서 놓친 영역에 포함된다. 그렇다 보니 과제가 반복될수록 알면서 놓친 것들만 가까이에 남는다.

실패의 원인은 이미 아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감히 손댈 수 없어 누구도 탓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럴 때면 조직도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이면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다만 기도하는 우리와 닮았다.  우리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장면을 기억에서 지우고, 멀리 보이는 행운의 풍경만 기억한다면 종국에는 삶의 고삐를 이방인에게 내어주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게 된다. 불완전한 시선은 우리 삶을 굴곡지게 한다.

우리는 자연이 보여 주는 다양한 표정 중에서 인상에 남은 단 하나의 순간을 기억한다. 아는 것만 눈에 들어오고 인식한 것만 머릿속에 이미지로 남는다. 필요한 것만 취하고 의미 없는 것은 버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 두뇌에는 망각을 허용하는 메커니즘이 시시각각 작동한다. 선택에 따라 기억에 남은 대상은 생략되거나 과장된다. 기억이 왜곡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우리의 기억은 머릿속에 드문드문하게 맞춰진 퍼즐 조각과 같은 모습으로 보관된다.

그런데 어떤 일을 떠올릴 때 우리의 마음은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목요연하게 이야기가 되지 않는 기억으로는 다른 사람은커녕 자신도 설득하기 어렵다. 공백은 추측이라는 과정을 통해 채워진다. 이렇게 맞춰진 이야기가 곧 나의 기억이 된다.

전체적인 개연성에 따라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정신의학에서는 개인의 우화(personal fable)라고 한다. 외부 자극에 쉽게 오염되는 기억은 저장된 시점보다 꺼내는 시점의 감정과 의지 그리고 주위 환경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기억은 현재의 내가 기대하는 시선으로 왜곡될 개연성이 높다. 왜곡된 기억에 기대어 자란 기대는 현재를 담아내지 못한다. 왜곡된 기억과 근거 없는 기대의 합인 나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폴 세잔은 같은 사과인데 아침에 본 기억 속의 사과와 오후에 마주한 사과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단순히 사과 하나일 뿐이라며 흘려버리지 않고 그 순간에 집중했다. 사과가 썩어서 버릴 때까지 각도와 시점을 달리하면서 그리고 다시 그리고, 고치고 또 고쳐 그렸다.

썩어가는 사과를 걱정하기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고착화된 시선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충격과 반성 그리고 재인식 과정을 통해 본질에 다가설 수 있었다. 사과 하나로 파리를 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프로이트는 기억이 의식에서 배제되는 것은 억압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봤다. 기억을 왜곡하고 위장함으로써 의식으로부터 위험한 기억을 차단하는 검열이라는 기제가 우리 내부에 작용한다.

반복적으로 어떤 장면을 잘못 기억하거나 기억을 왜곡한다면 어떤 감정과 의지가 작동해서 기억을 오염시키는지 살펴야 한다. 기억이 범하는 실수에 참을성 있게 반응하면서 기억이 왜곡되는 시점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알아낸다면 기억 왜곡은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결을 찾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명화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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