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사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까. 있다면 무얼까.

일요일 오후 퇴근길이었다. 그날은 하늘이 유독 변덕을 부렸다. 사무실에 있을 때도 비가 내리다가 갑자기 쌀알 같은 우박이 떨어지다가 이내 고요히 화창해지는 창밖을 보며 심상치 않다고 느낀 터였다.

집에 가려고 회사를 나서는데, 화창한가 싶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무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길은 물길에 잠겨 마치 계곡 같아 보였고, 우산을 써도 비가 사방으로 들이쳐 금세 옷이 젖었다.

버스정거장에 도착해 우산을 접고 숨을 돌리는데 한 중년 부부가 다가왔다. "수원시청역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얼굴이 꺼멓게 탄 남편 쪽이 물었다. 보아하니 둘은 양손 가득 짐을 싸든 채 지하철역 입구를 찾지 못해 버스정거장에 표류한 채였다.

초행길이구나, 하고 짐작했다. 지방에서 갓 상경했을까. 자식 내외를 찾아왔나. 괜한 상상력으로 그들의 사정을 넘겨짚은 탓인지 길을 알려 준 뒤에도 둘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때, 부부가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네더니 빗길에 맨몸으로 나서지 않겠는가.

"우산 없으세요?" "오늘 비가 안 올 줄 알고…."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근데 비가 많이 오네예." 그 말만 덧붙인 뒤 부부는 뒤를 돌았다.

그러자 기자 오른손이 의식할 새도 없이 뻗어나갔다. "저기, 이거 두 분이 쓰세요. 저는 하나 더 있어요." "돈을 드릴까요?" 머리를 질끈 묶은 아내분한테서 돌아온 말이었다.

괜찮다고 사례비를 거절하고 부부에게 우산을 들려 보낸 뒤 버스에 타고서도 고마움과 당황감이 섞인 여자의 눈빛과 돈을 주겠단 한마디가 묘하게 오래 남았다.

처음 드는 의문은 ‘그는 왜 돈을 주려고 했을까’였고, 그 다음 의문은 ‘나는 왜 돈을 거절했을까’였다. 답은 하나였다. 그 우산은 선의였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 선의에 고마움을 표할 대가를 지불하고 싶었고, 기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지랖을 넓혔기 때문에 받아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봤다. 만약 부부가 기자에게 돈부터 내밀며 우산을 팔라고 했다면 기자는 그 우산을 부부에게 선뜻 내어줬을까? 답은 ‘아니올시다’였다.

기자 눈앞에 지폐를 펄럭이는 가상의 누군가를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출처 모를 반감이 치솟았다. 분명 기자는 돈 때문에 우산을 팔고, 정작 스스로는 비를 맞으며 집에 가는 쪽을 선택하진 않았을 테다.

결혼식 하객이며 애인까지 대행하는 세상이다. 얼핏 이 세상에 돈으로 사지 못할 그 무언가는 없을 듯싶다. 그러나 빗방울 맺힌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며 기자는 확신했다. 적어도 돈으로 선의를 사지는 못한다고.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