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사회를 이끌며 화려하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건축물을 방치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흉물이 되느냐, 근대 문화유산이 되느냐는 활용의 차이다. 오래된 이야기를 추억하고, 이름을 기억하며,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원시 건축자산 재활용 네 번째 사례, 복합문화공간 111CM이 대표 격이다.

수원시 복합문화공간 111CM.
수원시 복합문화공간 111CM.

# 흐려진 이름, 대유평과 연초제조창

대형 복합쇼핑몰 건축공사가 한창인 장안구 화서역 일대. 화려한 변신을 준비 중인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수원 산업 중심지 구실을 하던 곳이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대유평(大有坪)’이라는 땅 이름이 이를 방증한다.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축조하며 백성들을 구호하려고 설치한 둔전 이름이 대유평이다.

수원 북부지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 지대로 꼽힌 대유평은 만석거와 축만제를 비롯한 수리시설을 갖추고 농업 발전에 핵심 노릇을 했다. 200여 년간 수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재료를 공급하며 각인한 이름이다.

1960년대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대유평은 연초제조창이라는 이름을 더했다. 담배인삼공사 담배 생산 공장이 들어서면서다.

36만여㎡ 넓은 대지 위에 7만5천여㎡ 규모로 건축한 연초제조창은 1971년 4월 1일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시나브로, 88, 라일락, 한라산, THIS를 비롯해 대한민국에서 생산한 담배 브랜드가 대유평 연초제조창에서 나왔다.

가장 성업하던 때에는 노동자 1천500여 명이 연간 1천100억 개비 담배를 생산했다고 한다. 농업 산실에서 근대 산업 산실로 기능이 변화한 셈이다.

32년간 역사를 이어오던 연초제조창은 담배산업의 정체와 공장 자동·접적 같은 시대 흐름에 따라 차츰 축소해 2003년 3월 14일을 마지막으로 가동을 멈췄다.

생산을 중단한 부지와 공장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흉물스러운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 이후 개발 요구가 거세지며 2017년 지구단위계획 변경을 결정하기까지 15년이 흘렀다. 대유평이라는 이름도, 연초제조창이라는 역사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시는 농업과 공업을 이어 수백 년간 주요 산업 중심지로 기능한 이 지역 역사성을 살리는 방법을 찾았다. 일대 도시개발을 진행하되 대유평 공원을 조성하고, 담배공장 건물 일부를 남겨 시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었다.

대유평 연초제조창은 그렇게 111CM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됐다.

4월 야외 광장에서 열린 ‘대유평 111 마르쉐’ 행사에서 예술인과 시민들이 함께 소통했다.
4월 야외 광장에서 열린 ‘대유평 111 마르쉐’ 행사에서 예술인과 시민들이 함께 소통했다.

# 산업화 시대 기억을 간직한 111CM

시민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111CM은 정자동 111이라는 지번과 모두가 하나되는 공동체를 원하는 뜻의 커뮤니티(Community)를 조합한 이름으로, 리모델링을 거쳐 2021년 11월 1일 문을 열었다.

회색빛 콘크리트가 인상 깊은 외관은 공장 모습 그대로다. 대규모 담배공장 가운데 자리했던 건물 일부를 개축해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 느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됐다.

파이거나 긁힌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는 오래된 기둥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했는데, 규격을 통일한 공간은 과거 공장으로서 기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다.

입구에는 담배공장 노동자가 사용했던 세면장을 현대식으로 구현한 공간이 방문객 호기심을 자극한다.

건물 가운데는 벽이 없는 야외다. 자유롭게 쉴 만한 계단형 공간과 광장을 자연스럽게 공원과 연결한다. 한쪽에는 아카이브 영상 전시기기 4대가 있다.

전시기기에서 ▶연초제조창 건립사(1967~1971년) ▶연초제조창 30년(1970~2004년) ▶버린 건물 재생(2019~2021년) ▶산업 유산에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2021~현재) 대유평 변천사를 한눈에 확인 가능하다.

중앙을 중심으로 2개 공간으로 나누는 내부 중 A동은 편의시설과 휴게 공간을 제공하려고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 중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야외 휴게 공간이 있는데, 오래된 지붕과 천창을 비롯해 담배공장이었던 건축물 역사를 온전히 느낌직하다.

커뮤니티 기능 핵심은 B동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다양한 전시·체험을 운영할 전시 공간이 펼쳐진다.

뒤편으로는 개방감을 주고 수시로 변하는 구조인 라운지 공간이 나타난다. 또 방문객이 개별로 시간을 보내거나 여유를 즐길 만한 휴식 공간에는 긴 테이블을 마련했다.

계단형 라운지 뒤편으로는 다목적실, 창작활동교육실, 스튜디오, 창의예술실험실을 비롯해 시민들이 사용하는 공간도 있다.

어린이를 비롯한 시민들이 111CM 내부 공간에서 진행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어린이를 비롯한 시민들이 111CM 내부 공간에서 진행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 주민 삶이 생동하는 문화제조창

연초제조창은 111CM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문화제조창’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주변 공동주택 단지는 물론 인근 주민들이 소통하며 문화를 즐기는 거점으로 기능하면서 청소년과 지역예술인에게 열린 공간을 제공하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우선 111CM은 북수원 권역 주민들이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 개관 당시 ‘IN&OUT’으로 복합 멀티미디어 전시를 선보인 데 이어 이듬해인 2022년 ‘특색:타인의 영역’, ‘THE 담배공장+’, ‘어제 본 하루 중에서’ 같은 기획전을 열었다. 올해는 ‘문화도시 수원 찾아가는 전시회’, ‘언덕 위의 아루스’를 비롯한 각종 전시를 개최했다.

라운지에서 공연도 활발하다. 개관 첫해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 브라스밴드 공연, 평일 오전 시간 수원시립예술단 공연을 즐기는 브런치 콘서트, 가족단위 방문객을 위한 참여형 프로그램과 버스킹 같은 다채로운 공연을 틈틈이 열었다.

예술이 시민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은 일은 건축자산을 다시 활용한 가장 큰 성과로 꼽는다. 전시나 공연을 연계한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진행함으로써 더 폭넓은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제공했다.

전시 기간 중 작가가 직접 진행하는 전시 투어와 아트 체험 행사를 열어 관람객과 소통을 강화한 점이 그 보기다.

수원지역 다양한 브랜드와 프로그램, 이벤트, 체험이 한데 어우러진 ‘대유평 111 마르쉐-봄 마실가 장(場)’ 행사도 성황을 이루며 예술과 생활이 교류하는 거점을 마련했다.

올해는 지역사회와 소통을 더욱 강화한다. 지난달까지 진행한 ‘언덕 위의 아루스’ 전시는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수업과 연계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예술 경험과 역량을 확장했다.

또 청소년 동아리에게 공간과 장비를 무상 지원하던 사업을 어른 동아리까지 확대해 ‘올-라운드 클럽’을 운영한다. 여기에 청년예술가의 예술계 진입을 지원하는 멘토링 사업 ‘새싹 예술가’도 시작한다.

111CM 휴게 공간에서 책을 읽던 한 시민은 "어린 시절 연초제조창 앞 잔디밭으로 소풍을 갔던 기억이 생생한데, 추억을 머금은 새로운 공간이 있어 반갑고 감사하다"며 "좋은 공간에서 더 많은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즐기도록 다양한 활용 방안을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강우 기자 kkw@kihoilbo.co.kr

사진=<수원시 제공>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